1950년 8월 1일 인민군이 강진을 점령했다. 이후 미군 정찰기가 자주 출몰했다. 배가 많이 있는 남포가 여러차례 폭격을 당했다. 사람들은 정찰기 소리만 나면 이리저리 숨어 들었다.  

3일 후인 8월 4일 오후 강진읍시장에서 인민재판이 열렸다. 강진의 우익인사 10명이 포승줄에 묶였다. 인민재판이 열린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온 주민들이 1천여명이 넘었다. 지리산에서 왔다는 빨치산 대장이 인민재판을 시작했다.

“여러분, 죄인들을 어떻게 하까요”. 군중속에서 한명이 외쳤다. “죽여야 합니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이 외쳤다. “옳소” 결국 인민재판을 받았던 10명은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했다.

바로 그때였다. “호주기가 온다”.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호주기는 미군 정찰기를 말하는 것이였다. 호주기가 떴다는 소리가 들리자 총살현장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빨치산부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남의 집 담을 넘어 뛰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순식간에 주변에 도망가던 사람들의 신발이 쌓였다. 호주기는 그만큼 무서운 존재였다.

그럼 주민들은 미군기를 왜 호주기라고 불렀을까. 이승만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연관이 있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스트리아 처녀였다. 이승만 박사와 결혼한 그녀에게 관습대로 택호가 붙여졌다. 흔히 친정 이름을 따다 쓰는 택호다.

그런데 당시는 유럽의 오스트리아(오지리)와 대양주 오스트레일리아(호주)를 구분이 어려웠다. 프란체스카 여사에게는 ‘호주댁’이란 택호가 붙여졌다. ‘강진신부’가 ‘영암댁’이 된 격이다.

착오는 착오를 불러 일으켰다. 6.25가 터지자 제트 전투기나 무스탕기(프로펠러 전투기)가 공산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모두 미공군기인데 호주전투기라는 소문이 났다.

호주댁(프란체스카 여사) 친정에서 사위(이승만 대통령)을 돕기 위해 보낸 전투기라는 것이었다. 무스탕이나 제트전투기가 뜨면 ‘호주기가 떴다’는 말은 이렇게 나오게 됐다.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기념관을 짓기 위한 모금운동이 시작됐다. 몇일전 신문기사에 프란체스카 여사의 모국인 오스트리아 한인회도 모금운동을 한다는 소식이 실렸다. 호주댁, 아니 오지리댁 친정 동네의 모금 소식이 새삼 눈길이 갔다.   <주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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