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고정 칼럼 ‘구강포에서’에 게재(8월 3일자 15면)된 김영국 전 순천향대 교수의 글 ‘도암고모’를 다섯 번 읽었다. ‘도암고모’는 찡함의 연속이다. 김 교수의 홍어 보다 강렬한 지적 삭힘이 도암고모를 우리에게 모셔온다. 

도암고모는 결혼한지 일년도 안돼 남편이 일본으로 떠났다. 그런데 일본 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 세월이 20년이었다. 여동생의 모습에 애가 탄 고모의 큰오빠(김 교수의 부친)가 매제를 찾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집을 찾아냈다. 그곳에 매제는 없었다. 대신 그의 일본인 부인과 커가는 아이들이 있었다. 매제는 자리를 피했던 것일까. 고모의 큰 오빠는 혼자서 현해탄을 건너왔다.

도암고모는 그 뒤로도 남편이 돌아 올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고모는 기도와 믿음이 생활의 전부였다. 기도와 믿음은 남편이 돌아오길 바라는 기원에 그치지 않았다. 그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이어졌다.

도암고모는 남편의 일본소식을 접하고 몇 년 더 사시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돌아가시기전까지 고모의 삶은 어느때 보다 믿음과 이웃 사랑으로 충만했다.  

김 교수는 ‘도대체 믿음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외롭고 고통스러웠을 삶을 그렇게 의연하고 생동감 있게 사셨을까.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은 것들의 증거다(히브리서 11장 1절)’라는 구절을 인용했다.

양자역학에서 관찰을 하면 전자가 입자에서 파동으로 바뀌거나, 파동에서 입자로 바뀌는 ‘관찰자 효과’도 ‘도암고모’에 등장한다. 관찰이 사물의 운동 형태를 바꿀수 있다는 물리학이론이다. 사람이 어떤 일에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바라면 그대로 이뤄질 수 있다는 물리학적 관점이다. 

유교에서는 경(敬)이 믿음과 상통한다. 학문을 할 때는 자신의 마음을 항상 흩어지지 않도록 고요하게 모아야한다. 불교에서도 신(信)을 중시한다. 깨달음의 세계(진여.眞如)로 가기 위해서는 깨달을 수 있다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김 교수는 우리곁에 수 많은 도암고모가 계셨다는 것을 일깨운다. 그 어려웠던 시절에 오직 믿음과 기도로 세상을 개척했던 사람들. 그래서 우리에게 행복을 선물해 주고 떠난 사람들이다. 김 교수의 글을 <강진일보>에 게재할 수 있어서 큰 감사함을 느낀다.                  <주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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