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성화대학 이사장이었던 이행기씨는 풍수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성화대학 재단 이사회에 스님을 참여시켜 그 사람의 조언을 대단히 깊이 있게 반영한 것으로 전해진다.

성화대학이 목포에 분교를 내려고 했을 때 분교의 이름까지도 스님의 조언을 들어 결정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성화대학이 한창 잘나갈 때의 이야기다.

이씨는 목포출신으로 원래 성화대 학교 건물을 짓던 건설업자였다. 전 재단이 재정적으로 어렵게 되자 학교를 인수해 하루아침에 대학 이사장이 됐다. 다사다난한 성화대 역사의 시작이었다.   

성화대학은 91년 설립과정에서부터 복잡했다. 성전출신 장충진씨가 벽봉학원이란 재단을 설립해 ‘강진공업전문대학’을 인가 받았으나 부지매입이 난관에 부딪쳤다. 94년말 경기도 성남출신인 정승기란 사람이 10억원에 재단을 인수한다.

그러나 정 이사장은 96년 10월 교수채용을 조건으로 22명으로부터 11억7천여만원을 받은게 들통났다. 정씨는 구속됐고 학교 주인으로서의 생명도 그렇게 끝났다.

이 과정에서 대학의 새 주인이 된 사람이 목포의 건설업자 이행기씨다. 세 번째 주인이었다. 나름대로 개교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나름대로 열성이 있었다. 1997년 1월 학교법인 세림학원을 만들고 성화전문대 설립인가를 받았다. 학교는 그해 3월에 개교했다. 

학교가 문을 열었지만 교수 채용과 관련된 비리가 여기저기서 드러났다. 이씨가 교수채용 댓가로 거액을 받은 혐의로 여러차례 재판을 받았다. 성화대학은 우여곡절 끝에 2011년 영구 폐교 조치를 당했고 풍수를 좋아했다는 이씨는 역사속으로 떠났다. 

이렇게 성화대학이 학교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부터 이행기 이사장 체제까지 불란이 계속되자 학교의 터 때문 아니냐는 말들이 잇따라 나왔다. 산이 악산인데다 그곳을 깍아서 터를 잡았고 건물 역시 북향이 많아 액운이 많은 곳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성화대 터가 영암쪽 밤재에서 넘어오는 바람을 직통으로 맞은 곳이라 바람잘 날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혔다.

그러나 결국은 사람의 문제였고 운영의 문제였다. 모든 불행은 사람으로 시작해 사람으로 끝났다. 옛 성화대학이 이번에 전남도 균형발전 300 프로젝트에 선정돼 새로운 날개를 달았다. 성공의 관건은 사람이 쥐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주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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