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윤순정 한일은행장이 강진 출신 첫 시중은행장

신동혁 한미은행장, 박진회 시티은행장으로 인맥 이어져
 

윤순정 전 한일은행장(강진읍 부춘. 좌) 신동혁 전 한미은행장(병영면 낙산. 가운데) 박진회 전 씨티은행장(작천면 구상. 우)
윤순정 전 한일은행장(강진읍 부춘. 좌) 신동혁 전 한미은행장(병영면 낙산. 가운데) 박진회 전 씨티은행장(작천면 구상. 우)

 

요즘에도 시중은행장은 각광 받지만 본격적인 경제개발이 진행되고, 산업화가 완성단계로 진입할 때 시중은행장은 최고의 스타였다.

지금은 시중은행이 7개이지만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5대 시중은행이라 해서 한일은행과 조흥, 상업, 제일, 서울은행 뿐이었다.

이 때문에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시중은행장에 오르는 것은 자신의 실력을 기본으로 정관계에 짱짱한 인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90년대 후반 그 어려운 시중은행장을 강진읍 부춘마을 출신 인사가 첫 스타트를 끊었다.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졌지만 부춘마을 주민들은 윤순정 전 한일은행장을 지금도 기억한다. 한일은행은 1999년 1월 한국상업은행과 합병하여 한빛은행이 됐으며 지금은 우리은행이 된 곳이다.

윤순정(33년생) 행장은 1990년부터 1994년까지 한일은행장을 지냈다. 1951년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1968년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수료했다. 1951년 한일은행에 들어가 명동ㆍ소공동 지점장, 상무, 감사, 전무 등을 거쳤다.

윤 행장은 94년 11월 자진 사퇴했는데 사퇴당시 과정은 지금도 금융계에서 화제다. 윤 행장은 2일 강진 부춘마을의 형집에 내려 왔다가 그날밤 전남대병원에 입원했으며, 3일 정부에 자진사퇴할 뜻을 정식 통보했다. 갑작스러운 사퇴였다. 

한일은행은 그날 오후 비상 확대이사회를 열어 윤 행장의 사표를 정식 수리했다. 이 때문에 금융계 사정 차원에서 정부의 종용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오늘날까지 관치금융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고 있다. 2009년 76세로 별세했다. 

이후 강진 출신 시중은행장으로는 병영 낙산마을 출신 신동혁(39년생) 한미은행장이 있다. 신동혁 행장은 윤순정 행장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신 행장은 광주일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64년 한일은행에 들어갔다. 

윤순정 행장의 13년 후배다. 이후 91년에 상근이사, 95년에 전무이사가 됐다. 윤순정 은행장이 재직할 때 일이다. 같은 동향으로서 우의가 돈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윤 행장이 사퇴한 3년 후인 98년 신동혁 전무는 한일은행장 직무대행이 된다. 그는 한일은행 전무와 행장대행을 맡으면서 한일은행과 상업은행의 합병을 추진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한빛은행장 후보에 올랐지만 한일과 상업출신 배제원칙에 밀렸다. 그는 결국 99년 한미은행으로 옮겨가면서 은행장이 됐다. 2002년 제8대 은행연합회장에 선임돼 은행원으로서 최고위 자리까지 올랐다. 

한미은행은 2004년 소유구조가 바뀌면서 한국씨티은행으로 이름이 바뀐다.  2014년 10월 강진출신 박진회 은행장이 취임한다. 박 은행장은 작천 구상마을 출신으로 박세정 대선제분 창업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박진회 행장은 84년에 한미은행에 들어갔다. 99년 신동혁 한미은행장이 있을 때 자금당당 본부장을 하고 있었다. 이후 한미은행의 바뀐 이름 은행인 씨티은행장이 됐다.  

박진회 행장은 2020년 12월 한국시티은행행장에서 물러나 인터넷전문은행 토스뱅크 사외이사를 거쳐 현재는 SK이노베이션 이사회의장을 하고 있다.
 
이렇게 살펴볼 때 강진의 시중 은행장 인맥은 부춘마을 출신 윤순정 한일은행장으로부터 시작해 같이 한일은행에서 근무했던 병영 출신 신동혁 한미은행장으로 연결되고, 신동혁 한미은행장의 인맥은 작천 구상마을 출신 박진회 시티은행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모두 강진이란 고향을 끈으로 묶여진 인맥이라 할 수 있다./주희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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