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수가 유명했던 마을… 지금도 그 약수 나올까

 

만덕산과 임천리 저수지가 보이는 곳에 학림마을이 있다. 학림(鶴林)마을의 명칭은 조선 중엽 무렵 마을 좌우로 큰나무들이 무성하여 학이 많이 살아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마을 앞 임천리 저수지 너머에는 강진의 명산 만덕산(409m)이 태풍같은 자연재해를 막아주는 방패역할을 해 농사를 짓기에는 최적의 형태를 띄고 있다. 마을의 주요지명은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이름을 가진 곳이 아직까지 사용되고 있다.
 

마을 안쪽에 긴 골목이 있다.
마을 안쪽에 긴 골목이 있다.
오래된 집의 벽이 예쁘게 꾸며져 있다.
오래된 집의 벽이 예쁘게 꾸며져 있다.

 

학림마을은 예전부터 물맛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마을 뒤편에 위치한 아양동에서 일제강점기때인 1935년경 당시 강진의 제일의 갑부인 김대홍씨의 부친이 아양약수장을 개발해 전국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였고 심지어 나병환자도 약수를 통해 병이 나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당시에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현재에도 마을뒷편 깊은 산중에 있는 자그마한 산사에 약수시설이 아직도 존재해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골목은 골목으로 이어진다.
골목은 골목으로 이어진다.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집이다.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집이다.

 

고려시대 학림마을은 김씨 일가가 터를 잡고 본래 김지터(金地攄씨)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김씨일가가 학림마을에 터를 잡은 것은 확실하나 본관이 어딘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김씨일가가 고려시대때 학림마을에 터를 잡은 이후 조선 이조 중엽이후에 장흥임씨들이 학림마을에 유입이 되면서 김지터에서 학림으로 지명을 바꾸고 자자일촌을 이루면서 생활했다.

잔디와 정원이 잘 꾸며진 집이다.
잔디와 정원이 잘 꾸며진 집이다.
담쟁이 덩쿨이 무성하다.
담쟁이 덩쿨이 무성하다.

 

이어 해남윤씨, 창영성씨, 청주김씨들의 주민들이 마을로 입주하면서 한때 50여호의 가구 수에 300여명이 넘는 주민들이 생활할 정도로 중규모의 마을을 이뤘다. 하지만 주민들이 사망하거나 젊은 사람들이 자녀의 교육을 위해 도시로 떠나면서 현재는 20여호의 가구들만이 남아 한적한 마을로 변모했다.

마을의 동쪽이다.
마을의 동쪽이다.

 

다산의 제자중에 이청이 있다. 흔히 이학래로 불렸던 이청은 다산선생의 집필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제자로 통한다. 다산선생이 처음 강진에 도착했을 때 이청의 아버지가 큰 도움을 줘 인연이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청은 학림이라는 호가 있어 당시 지역명칭을 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학림마을 출생이라는 설도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주희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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