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마량 신마마을에서 마을 유래비 제막식이 열렸다<본지 6월 29일자 5면 보도>. 예전에는 마을비나 표지석을 규모있게 만들어 잔치를 여는 곳이 꽤 있었으나 요즘에는 참 귀하다. 마을에 노인들만 있는 곳이 많아 기념물을 설치하는게 무거운 짐이다.

그래도 마을에 이런저런 일이 많아야 살맛이 나는 법이다. 이번에 신마마을 비석 제막행사도 보니 이재범 이장과 주민들이 잔치를 준비하고 전순규 재경신마마을회장과 회원들도 많이 참석해서 오랜만에 마을이 떠들썩 했다.

마을 유래비에는 역사를 새겼다. 신마(新馬)마을의 옛 이름은 ‘땀마’였다. 담장을 쌓아서 말을 기르는 곳이라는 의미다. ‘땀마’는 마량에서 전해오는 오마지간(五馬之間)중 하나다.

원마(元馬), 숙마(宿馬), 땀마(땀馬), 백마(白馬), 음마(飮馬)가 오마지간이다. 원마와 숙마, 땀마(신마)는 공식적으로 행정마을이다. 나머지 백마와 음마는 정확한 행정마을 이름으로는 내려오지 않는다. 

신마마을의 기원 땀마란 이름은 마량의 말 역사를 오롯히 담고 있다. 인근 숙마마을에 가면 지금도 집 정원이나 담장에 흔치 않은 돌들이 있다. 제주 현무암이다. 조선시대 제주에서 말을 싣고 올 때 함께 왔던 돌들이다.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목선 제일 아래 바닥에 깔았던 일종의 수평석이었다. 배가 제주도로 돌아 갈때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이 돌들을 육지에 버리고 갔다.

숙마마을 앞은 40여년전 경지정리를 할 때 마을 건너편 관매등이란 곳에서 화산석이 대량으로 쏟아졌다. 관매등은 제주배가 도착하는 곳이었다. 

신마를 포함한 오마지간은 마량의 800년 말 역사를 말해준다. 제주말은 고려문종 27년(1073)에 공물로 바치기 시작한 기록이 있다. 그후로 마지막 기록이 1871년(고종 8년)이다. 제주도 섬에서 자란 말은 육지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태종 7년(1407) 제주에서 조정에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린다.  “말이 바다에서 멀미를 심하게 하는데 육지에 내리면 초죽엄이 됩니다. 비옵건대 육지에 돌성(城)을 쌓아 일정기간 기르면서 풀과 물을 순서대로 주면서 적응토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마량에 말이 도착하면 말을 가둬 풀어 놓을 곳도, 물을 마실 곳도, 관리들이 잠자는 곳도 생겨났다. 마량의 오마지간이 탄생한 사연이다. 신마마을 마을유래비가 마량의 역사를 다시 상기 시킨다.   <주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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