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영성을 통해 문화와 민속품에 관심을 갖게 됐다

어머니의 도움으로 어렵게 광주사범대학 부속중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학교 졸업후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해야 했는데 나는 서울의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정형편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광주로 중학교를 보내는 일도 가정형편상 힘든 일이었지만 어머니의 노력으로 겨우 졸업할 수 있었는데 서울로 유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고등학교 진학은 하지 못하고 광주의 간판집 일까지 여러 가지 일을 배우며 지냈다가 1966년 군입대를 하게 됐다. 군대 제대후에는 친척의 도움으로 전파사 일을 하게 됐다.

형광등을 조립하고 고장난 등을 수리해주는 일이었는데 이 일을 하면서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일로 인해 제주도를 가기도 했고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다.

부산에서는 공장에서 일을 하며 지냈는데 그곳에서 지금 부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됐는데 이때부터 귀향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부산에서 직장생활은 힘들었다. 이때 방송에서는 새마을운동이 한창 홍보에 나설 70년대 초였다.

새마을운동 문구중에서 시골에서도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어머니와 상의 끝에 결국 고향 병영으로 돌아오게 됐다. 내 나이 20대 후반이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 집은 논 2마지기 400평과 밭 8마지기 560평이 재산의 전부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농사를 지으면서 친척의 도움으로 초등학교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시작한 학교에서의 일은 월급음 많지 않았지만 보람도 느낄 수 있었고 여러 사람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교장, 교감 선생님과 여러 교사, 직원들과 어울리면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다양한 지식과 정보, 교훈도 배울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이었다.

이 학교에서의 생활은 내가 문화와 민속품에 관심을 갖고 오늘날 와보랑께박물관을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됐던 것 같다. 70~80년대만 하더라도 병영성이 복원되기 이전이었다. 나는 내가 근무했던 학교가 병영초등학교였는데 당시 학교 위치가 병영성내에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병영성에 관심을 갖게 됐다.

더욱 당시 전남대학교 김태진 교수가 외국인을 데리고 병영성을 방문했는데 성터 주위를 들러 보는 것을 보게 됐는데 이때부터 병영성에 본격적으로 흥미를 갖게 됐다. 그러나 이때만 하더라도 병영성에 관한 자료를 찾기란 어려웠다.

지역에서도 병영성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그에 대한 자료도 없었던 것. 나는 일부 조금씩이라도 기술된 자료들을 수집해 나갔다. 이렇게 병영성 자료를 모으면서 오래전 병영중학교 교장을 지냈던 한 분이 일부 병영성 자료를 모아 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지만 이 자료는 구할수 없었다.

이때 모았던 병영성 자료를 스크랩해서 복사기를 이용해 10여부를 복사해 병영면내 여러 기관들에 전달해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당시 병영면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최창권씨를 만나게 됐고 이후 탐진향토문화연구회라는 단체에 가입하게 됐다.

이때 나는 회원들과 마을사를 조사하게 됐고 1년 후 책이 나왔다. 이 일을 계기로 장흥의 용반마을에서 마을소식지가 발행되는 것을 보고 도룡마을에서도 소식지를 만들고 싶었다. 2년동안 노력한 끝에 마을소식지를 만들 수 있었는데 이 마을지는 조선일보와 방송국에서도 취재를 와서 전국에 소개되기도 했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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