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추억은 옛것에 대한 소중함 알게 된 계기가 됐다

지금은 중학교에 입학하는데 시험을 보지 않지만 내가 학교다닐때에는 중학교 입학도 시험을 봤다. 시험에 합격해야만 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골의 중학교는 경쟁률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됐지만 나는 공부에 뜻이 있어 광주에 있는 사범대학 부속 중학교를 지원하게 됐다. 내가 지원했던 이 중학교는 당시로서는 광주서중과 함께 최고로 인기가 높았던 학교였다. 기억으로는 입학시험 당시 경쟁률이 6대1정도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광주와 전남지역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경쟁률이 쎈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잇었던 것은 수상경력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운이 좋게도 전남도지사상을 받았는데 이때 도지사상 받은 사람은 강진 김향수 장학재단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학교에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때 병영동초등학교에서는 내가 광주사범대학 부속중학교에 지원했고 병영북초등학교에서는 조병선이라는 친구가 지원해 합격했고 함께 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해는 3.15부정선거가 있었던 해였는데 입학후 몇일 학교를 다니다가 4.19 혁명을 겪어야 했다.

친구 조병선과 나는 같은 집에서 하숙을 하며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우리는 병영의 초등학교에서는 나름대로 상위권 성적이었지만 이 곳 중학교에서는 그다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광주라는 낯선 곳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광주와 전남 전 지역에서 성적이 좋았던 아이들이 모였기 때문에 경쟁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는 엄청난 경쟁속에 대부분의 과목들에 있어서 좋은 성적을 받지 못했고 흥미도 잃어갔지만 미술시간의 그림그리기만큼은 좋아했다. 지금와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림을 잘 그리는 편도 아니었던 것 같다.

어느 날은 광주시내에서 사생대회가 있었는데 친구들과 함께 대회에 나갔지만 다른 친구들은 입상을 했지만 나는 입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가 좋아 계속 그렸다. 시내에서 전시회가 있을때면 구경 하는 것도 즐거웠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무렵 교사자격증 제도가 바뀌게 됐다. 지금까지는 사범학교만 졸업하면 교사자격증을 주었지만 법제도가 갑자기 바뀌면서 교육대학교를 졸업해야만 자격증을 주는 것으로 변경됐다. 

나와 가족들은 교사라는 꿈을 위해 사범대학 부속중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이 정책변경 발표는 혼란스러웠다. 이때 나에게 묘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나는 서석동 삼촌집에서 의대를 다니는 형과 같은 방을 쓰고 있었는데 나는 가족들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살고싶다고 발표하고 학교에 나가지도 않았다.

이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던 나의 어머니는 광주로 올라오셨다. 이 일을 계기로 친척들사이에서 유명해졌다. 간신히 친척들과 어머니가 나를 달래서 학교는 계속 다니게 되었다. 

내가 그림에 흥미를 갖고 화가의 길을 걷게 된 것도 이 시기덕분이었다. 나는 학교를 다니며 미술실을 오가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이 곳에서 양수아, 손동 선생님들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좋은 성적은 얻지 못했지만 나의 중학교 생활은 내가 그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이때 추억으로 나는 현재 화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림에 대한 추억들은 옛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게 돼 와보랑께박물관의 시초가 됐다.           <정리=오기안 기자>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