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게 메고 산에 올랐다가 산주에게 쫓겨다녔다

나의 일생중에서 초등학교 졸업때까지 시골생활은 하나하나 지워지지 않은 추억 덩어리이자 삶의 에너지이다. 초등학교 졸업후에는 광주로 중학교 진학을 했고 그 이후에도 줄곧 도시에서 생활했기에 초등학교 시절은 나에게 더욱 소중한 기억이다.

오늘은 이 시절 이야기중 하나를 해보고자 한다. 이 시절 초등학생들도 공부외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나도 학교를 다녀오고 나서 망태라는 물건을 들고 풀을 뜯어와야만 했다. 이때 풀은 돼지의 먹이로 사용했다.

이때 돼지가 풀을 먹고 대소변을 보곤 하는데 이 것들은 농사를 짓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퇴비로 활용된다. 이때만 하더라도 퇴비가 아주 귀했던 시절이었기에 돼지를 먹이는 일은 중요했다.

이때 우리 집에서도 돼지와 닭, 토끼, 오리를 키웠다. 어머니는 바느질과 시장에 물건파는 일로 바쁘셨기 때문에 가축을 돌보는 일은 내가 도맡았다. 하기 싫을 때도 많았지만 어머니가 시킨 풀베기는 될수 있으면 잘 수행하려고 노력했다. 들에서 풀을 뜯어다가 돼지와 토끼 등에게 먹이로 주곤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놀기에 바빴던 기억이 난다.

이 시절 마을 집 대부분은 초가집이었고 장작을 때는 아궁이로 난방과 밥을 해먹었기 때문에 장작거리를 구하는 일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보통 아침밥 먹으면 나무하러 가는 것이 일이었다. 비나 눈이 많이와서 산에 오를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산으로 나무를 하러가야 했다. 초등학교 시절 작은 지게에다 나무를 해서 내려오면 칭찬을 받았다. 어떨때면 칭찬에 기분이 좋아 아침과 저녁에 나무를 해오고 추가로 한번 더 산에 올라 나무를 해오기도 했다.

보통 장작거리를 구하는 것이 산에 올라 그냥 무작정 해오는 것이 아니라 산마다 주인이 있기 때문에 주인이 지키지 않는 산이나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산으로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허락을 받고 나무를 베지 않았던 시절이기에 가능했다.

멀리 떨어진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야 하기때문에 산에 오를때는 가벼워서 수월하지만 나무를 지게에 올려 내려올때는 너무 무거워 어깨, 허리가 아파서 힘들었다. 보통 내가 자주 다니던 마을 뒷산에 올라 나무를 해올 때는 유치나무거리라고 나무꾼 쉼터가 있었다. 

그곳에서 잠시 쉬었다가 집에까지 지고 와야 했는데 나무를 너무 많이 해와도 집까지 운반하는 일이 고생이었고 너무 적게 가져가면 집안 어른들로부터 잔소리를 들어야 했기에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이었다.

어느 날은 동네와 가까운 냉수골이라는 곳과 공동리 계곡으로 나무를 하러 산에 올랐다. 이 날은 산 주인이 나무를 하러 올라오는 나를 보고 쫓아오는 것이었다. 주인에게 붙잡힌 나는 갈코리와 지게를 뺏기기도 했고 빈지게를 메고 다른 곳으로 도망가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이 때문에 이 곳 일대는 나무들이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나무가 많이 자라나 울창한 숲을 이뤄 이제는 산책을 위해서도 오르기 힘든 곳이 되어버렸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 나는 주로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운동화는 가격이 비쌌기에 사달라고 조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래서 나도 초등학교 저학년때는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5학년 무렵부터는 어머니가 운동화를 사주셨다. 

어머니가 사준 운동화에 기뻐서 밤에 잘때 안고 자기도 했고 설날때 신기 위해 설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추억도 생각난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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