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 바닥 꺼지면서 묘지관이 나타나 깜짝 놀랐다

나는 어린시절 말썽을 많이 부렸고 장난끼도 많았다. 사투리로 ‘부잡스럽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학교생활 중에 기억 나는 것이 있다면 방학 숙제였다. 어느 해인가 방학숙제를 해야 했는데 부모님과 함께 만들기를 해야 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만들어 만들기를 했다.

두꺼운 각대기 종이를 가지고 사람의 몸통을 만들고 팔과 다리는 분리해서 만들어 몸통에 붙였다.

여기에 실을 가지고 팔, 다리부분에 연결하여 밑에서 실을 잡아 다니면 팔다리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만들기 작품이었다. 내가 만들었지만 당시 장난감도 귀했던 시절이었기에 재미있게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또 방학 숙제중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나는 크레파스로 집 주변에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초가집 지붕위에 박 넝쿨이 자라고 박이 열려 있는 모습을 그림을 그려 상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이때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다.

나는 초등학교 1, 2학년은 지금 병영 공동리 학교터에 있었던 건물로 학교를 다녔고 3, 4학년은 산아래 있던 건물로 학교를 다녔다. 4학년말에는 지금의 도룡마을 앞 학교에 건물이 들어서고 이곳으로 다녔다. 

공동리 옆에 있던 학교는 교실이 4개였는데 기와지붕에 벽면은 판자로 붙여진 목재건물이었다. 얼마 후 건물이 앞으로 쓸려서 넘어지는지 바람에 쓰러지지 않게 밭에 기둥을 세워 고정시켜놓았던 기억이 난다. 이 때문에 교실안에서 공부한 기억은 없고 간이로 만들었던 천막 교실에서 공부를 하곤 했다. 

날씨가 좋을 때는 학교옆 숲의 동백나무에 칠판을 매달아 놓고 공부하기도 했다. 또 어느 날은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바닥이 꺼져서 살펴보니 그 안에 사람의 묘지관 구멍이 있었다. 갑자기 무덤이 나타나 나와 친구들은 깜짝 놀라 도망가기도 했다. 

이때 우리반 학생수는 60명정도였는데 집안일로 안나오는 이들이 있어 평상시에는 40-50명씩 공부했다. 이때 집안일은 주로 농번기때 부모님 일을 돕는 것이었고 몇몇 친구들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월사금을 내지못해서 학교를 나오지 못하기도 했다. 

나는 어머니께서 나를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 오셨기때문에 월사금을 내지 못했던 기억은 없다. 어머니는 바느질 솜씨가 좋아 집에 있었던 미싱기계를 이용해 명절때면 동네 아이들 옷을 만들어주고 품삯을 받아 돈을 모아 밭을 구입했다. 

어머니의 노력덕분에 초등학교때 나의 성적은 좋은 편이였다. 공부외에 그림그리기에도 솜씨가 있어서 교실 환경정리나 학습 자료를 만들때 선생님을 돕곤 했다. 

6학년때는 중학교를 가기 위해 시험공부를 했는데 학교에서 정규 수업이 끝난이후 선생님 집에서 성적이 좋았던 6명정도가 모여 함께 공부를 하곤 했던 추억도 생각난다.

선생님 집에서 공부를 하면서 생각나는 것은 바로 라디오였다. 이때 라디오는 상당히 귀한 물건이었는데 우리 마을에서 유일하게 선생님만 라디오를 가지고 계셨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때였기에 선생님은 공부하는 우리들의 방에 밧데리를 이용해 라디오를 틀어주셨다. 

우리들은 책은 보고 있지만 라디오를 듣는 게 재미있었다. 선생님은 일을 하고 사모님은 한쪽에서 바느질하고 우리들은 밥상에 불 켜놓고 공부를 했는데 공부한 기억보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연속극 등을 재미있게 들었던 기억만 남아있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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