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아픈 나를 업고 화방마을 한의사에게 달려갔다

나의 아버지는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내가 6살때 일찍 돌아가셨다. 하지만 생전 나를 무척 사랑하셨던 것 같다. 내가 태어나서 어머니의 이야기에 따르면 온갖 당시 유행하는 병은 빠짐없이 앓았다고 한다. 어린 아이가 자주 아프니 어머니는 후에 나에게 “징글징글하고 짜증스러울 지경이었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한번은 내가 소화기 계통의 병을 엄청 심하게 앓아 열이 나고 힘이 없어 울지도 못하는 지경까지 이른적이 있었다. 이때 아버지는 지금 군동면 화방마을에 용하다는 한의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와서 한밤중에 나를 안고 약 4㎞이상 떨어진 그 곳까지 가서 치료를 받도록 했다. 아마 그대로 두었으면 그날 밤을 넘기지 못했을 것을 응급처치한 덕분에 살 수 있었다.

그 후 나의 아버지는 그 한의사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살아 생전에 자주 찾아갔다는 얘기를 들었고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신 후에도 그 한의사는 우리집을 찾아 오셨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또 아버지가 부산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마을의 사진관에 가서 나와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다. 이 사진을 찍고 아버지는 부산으로 떠나셨다가 풍랑을 만나 돌아가셨다. 이 사진은 아버지와 남긴 마지막 추억으로 아버지는 이 사진을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 나는 지금도 이 사진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이 사진을 못보셨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전해들었다. 

이렇게 나는 몹시 병약하여 자주 아팠고 나중에는 사고를 자주 내기도 했다. 나는 그 당시 유행하는 나이롱 옷감을 구입해 그걸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성냥이 귀했는데 나무가지에 황을 뭍여 화롯불에 불을 부쳐 아궁이의 불을 때는데 사용하곤 했다.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어른들이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황이 묻은 댓가지를 화롯가에서 가지고 놀다 옷에 불이 붙어버렸다. 이 모습을 지켜본 할머니와 어머니가 달려와 불이 붙은 나의 옷을 벗겼으나 이미 오른쪽 가슴과 겨드랑이 부위에 보기흉한 상처가 남고 말았다. 이 사고로 나는 몇 개월동안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등 여러 식구들의 속을 많이 상하게 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내가 말을 듣지 않고 속을 썩일때면 “차라리 그때 가버렸으면 좋았을 걸 지금 저렇게 속상하게 한다”는 이야기를 하시기도 하셨다. 오죽 내가 맘을 상하게 하였으면 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셨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죄송한 마음뿐이다. 이때 입은 상처는 나의 몸에 현재도 남아있고 자라면서 한때는 목욕탕 가면 남들이 처다 보는 시선이 싫어 목욕탕을 가지 않았다. 

이후 나는 병영동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기념으로 어머니는 나에게 비싼 공책 한 권과 연필 한 자루를 사주셨다. 처음에만 공책을 사용했고 이후에는 ‘백노지’를 한 장씩 사오셨다. 나는 칼로 종이를 잘라 실로 꿰매어 노트처럼 만들어 사용했다. 

가방은 중학교 들어가서 사용했고 초등학교 때는 보자기에 책과 노트를 싸서 등에 묶어메고 학교에 다녔다. 도시락까지 함께 매고 다녔기에 걸음 걸을때마다 도시락 안에서 젓가락과 반찬그릇 소리가 요란했다. 

또 초등학교에 다닐 때 기억으로 소풍갔을 때 평소에는 먹기 힘든 계란을 싸주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아껴먹기도 했다. 지금 같으면 엄두도 못 낼 화방사, 금곡사, 수인산 꼭대기 등 먼 곳으로 소풍을 갔었다. 왕복 4시간이상 걸어야 했기에 주저 앉고 싶을 정도로 힘겨웠던 생각이 난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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