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병영은 1417년 강진 병영으로 옮겨 온 후 1894년 동학혁명군에 의해 함락된다. 병영성과 주변 민가는 초토화가 됐다. 병영성은 함락후 1년만인 1895년 폐영된다. 병영성이 폐영되자 지방의 세력가들과 돈많은 상인들이 병영을 떠났다.

남아 있는 주민들은 주변 강진군민들로부터 ‘압제’를 되돌려 받아야만 했다고 한다. 아마도 병영성의 지나친 수탈로 불만을 품고 있던 주변 주민들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앙갚음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병영주민들은 어떻게 하면 옛날의 영광을 다시 되찾을까 궁리했다. 그러던 중 지역유지들이 한 장군을 만났다. 그는 “옛 병영성 군인들만은 못하지만 진위대를 설치하면 좋을 것”이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진위대는 구한말 신식군대의 이름이다. 귀가 번뜩 트인 병영사람들은 즉시 돈을 걷었다. 서울로 사람을 보낼 경비와 뇌물로 사용할 돈이었다. 적지 않은 돈이 순식간에 모아졌다.

명선욱과 최경화라는 주민을 대표로 뽑아 서울로 보냈다. 서울에 도착한 이들은 몇 달동안 머물면서 교섭활동을 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진위대는 병영에 제4대대 분견소를 설치하고 50명의 군인을 주둔시켰다. 

그러나 분견소의 기능은 옛 병영성과 비교할 바가 못됐다. 그때는 이미 전라도 53개 군현에서 납부하던 세금도 없어졌고 5개진에서 현물로 바치던 특산물도 없어졌다. 그나마 분견소는 1907년 정미조약으로 해산되면서 근무하던 군인들도 뿔뿔히 흩어졌다. 병영의 군대 역사는 사실상 그때 막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진위대가 병영에 주둔할 때 근무했던 지역출신 인사가 나왔다. 병영 삼인리 출신의 고 정창우(1886년생) 선생이다. 정 선생은 1905년 병영에 주둔해 있던 진위대 4대대 분견소에서 2년 여 동안 근무했다는게 유족들의 증언이다. 그러니까 진위대 부대원들이 서울에서만 온게 아니라 지역사람들도 활동 했다는게 증명된 셈이다.

부대 해산으로 흩어진 진위대 대원들은 상당수 의병에 투신했다. 먼저 활동중이던 의병들은 오합지졸이 많았다. 의병단은 기본적인 훈련을 받았고 무기를 다룰 줄 아는 진위대원들을 열열히 환영했다. 정창우 선생도 러시아에서 의병활동을 했다고 하니까 그 길을 걸었던 것이다. 정 선생 외에도 강진 사람이 더 있었을 것이다. 강진의 새로운 역사 줄기가 한 가닥 잡혔다.   <주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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