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청진과 부산 오갔던 병영상인

사람마다 과거가 있고 과거가 있었기에 지금 현재가 있다. 과거 어떻게 살아왔나 생각 해 보는 것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생각 해 볼 수 있는 시간이다. 먼저 나의 과거를 생각 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이 나를 아는 사람들이 또 내 자녀들, 손자가 아버지는, 할아버지는 어떤 사람 이였고 어떻게 살았을까 이런 생각이 궁금할 때 읽는 글이 되면 좋겠다.

내가 자라면서 어머님으로부터 듣는 얘기가 많고, 겪은 얘기가 되겠다. 우리집은 나로서 증조부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의 증조부는 약간 다리가 불편하셨다. 하시는 일은 지금 병영면 도룡리 180번지에서 한약방을 하셨다. 생업으로 약방을 하시면서 약간의 전답을 마련하셨다. 자녀는 1남 2녀를 두셨다. 할머니 한분은 상림리 장씨 집안으로 결혼하셨고 또다른 할머니는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우리집에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들은바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이씨 집안으로 결혼했다. 이때는 일제강점기 시대였고 살기 어려워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장사를 다니다 청진에 자리를 잡으셨다. 요즘으로 말하면 병영상인이셨던 셈이다.

할아버지가 청진에 자리를 잡은 얘기는 장사를 다니다 청진에서 머물다 성실하게 일하는걸 보고 주인눈에 들어 그 집에서 눌러 살게 되었다. 당시 할아버지께서는 지금으로 말하면 운송업을 하셨다. 나의 아버지는 청진에서 상업고등학교를 나오셨고 고모도 청진에서 결혼을 해서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병영에 계셨기 때문에 청진과 병영을 오가며 생활하셨다. 해방 후에는 아버지는 병영에 내려오셨고 사업을 하셨다. 아버지는 병영상인으로 약품중간 상인을 하셨다. 이때만 하더라도 생활물자가 부족한 시기라 약품도 턱없이 모자랐다. 

아버지는 부산에서 약품을 구입해 배로 가져와 장흥, 강진, 영암 등에 있는 병원이나 약국에 판매했다. 무엇이든 부족했던 시기였기에 장사는 잘 됐고 마을사람 한명을 고용해 함께 일하게 됐다. 하지만 이 사람이 중간에서 수금한 돈과 거래장부를 들고 도망가버렸다.

당시 논 몇 십여마지기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거의 1억원에 가까운 큰 금액이었다. 이 돈은 당시 우리집의 전 재산이었다.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아버지는 장사를 해야만 했다.

밑천이 없었기에 병영에 있는 친척에게 벼를 빌려 부산에 팔아 돈을 만들었고 이를 밑천으로 다시 예전처럼 약중간상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부산으로 벼를 배로 보내고 다음배를 타고 부산으로 출발했는데 지금의 충무 앞바다에서 풍랑으로 난파돼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어머니는 모든 살림을 떠맡아야만 했다. 그때 내 나이가 6살이었다. 그러나 나를 무척 예뻐하셨다는 얘기는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아버지가 사고 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어머니가 안전부절 하시던 모습과 마을점쟁이 할머니집에 허둥대며 물어보러 가셨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집으로 모시게 됐는데 대문이 작아 들어오지 못해 담벼락을 허물었던 기억이 난다. 

장례를 위해 산에 가서 관을 하관하기전 관 판자에서 소나무옹이 빠진 구멍이 하나 있었다. 나는 구멍을 들여다 보며 관안에 아버지가 있다고 이야기 했던 기억이 난다.  <정리=오기안 기자>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