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암교회에 가면 눈에 띄는게 석조교회당 건물이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69년 신도들의 손으로 인근 하천에서 모래를 나르는 작업이 시작됐다.

4천여장의 돌은 수양마을과 인근 하천에서 나른 것이다. 1970년 7월 24일 주춧돌이 놓여졌고 1972년 4월 9일 건물을 준공했다. 3년이란 세월이 소요된 작품이다. 

강진에 70년대가 왔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 때 이야기다. 박정희 후보와 야당 김대중 후보의 빅 매치가 벌어졌다. 강진에도 선거바람이 불었다.  

도암교회 젊은 신자들이 71년 초 도암면민주수호협의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불법선거를 감시하겠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기세등등함이 하늘을 찔렀다. 불법선거 운운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던 때였다. 4월 27일 역사적인 선거날이 왔다.

도암초등학교에 투표장이 만들어 졌다. 그때 도암면민주수호협의회 회원들이 투표장에 가지고 들어간게 있다. 개인용 소변통이다. 바깥 출입하지 않고 하룻네 투표장을 지키겠다는 각오였다.

대리투표나 뭉치투표가 만연했다. 그날 오후 투표장 한켠에서 박정희 후보를 찍은 투표용지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협의회 회원들이 당장 항의에 들어갔다. 단체행동을 준비했다. 구체적인 일정도 짰다.

그날밤, 초가집이었던 교회사택으로 선거관리위원장을 비롯한 선거업무 관계자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고개숙여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이 사건이 큰 계기가 됐다. 정권이라면 무서운 존재로만 생각되던 시절이다. 면단위에 사는 ‘촌사람들’도 잘못된 것을 정당하게 지적하면 정권이 고개를 숙인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렇게 도암교회에서 시작된 민주화운동 바람은 강진읍교회로 확산됐고, 75년 2월 민주회복국민회의 강진군지부 결성으로 이어졌다. 80년대 강진읍교회는 민주화운동의 중심이 된다. 

도암교회가 올해로 창립 90주년을 맞아 지난주 기념예배를 올렸다. 그 역사속에 배영석 목사와 윤기석 목사의 이름이 뚜렷하다. 배목사는 전도사로 시작한 초대 목사다.

윤기석 목사는 66년 부임해 10년 동안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마치 도인의 일생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숙연해진다. 도암교회 90년이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이 그렇게 크고 높다. 벌써 100주년이 기대된다. <주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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