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읍 고내마을 출생
광주 기독교협의회장 활동
늘 현장에 있었던 목회자

2019년 7월부터 2022년 6월까지
본지에 132회 걸쳐 고향이야기 기고

거주지 나주에서 강진까지 
버스타고 다니며 고향 취재
‘고향위해 봉사하는 것 뿐’
원고료도 절대 받지 않아

오랜 세월 재야운동가로 활동했고, 본지 대기자로 강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집필해 온 김병균 목사가 지난달 30일 별세했다. 향년 74세. 장례식은 지난 3일 광주에서 통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김병균 목사는 강진읍 동성리 고내마을 출신으로 중앙초등학교(48회)와 광주서중을 나왔다. 이어 호남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의 길을 걸었다.

김 목사는 40년간 나주 농촌목회자로 활동을 하면서 전남NCC인권위원장, 예장농목회장, 전국 목정평상임의장, 광주 기독교협의회장(NCC) 나주 촛불집회 상임대표, 평통사 공동의장 등 활동을 통해 인간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김 목사는 적극적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 지난 1995년 범민련 남측 본부 29인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하였고 1997년 조선대생 류재을 열사 추모집회 관련하여 구속되기도 하였고 2005년 광주군공항 패트리어트 반대 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등 수많은 시국, 공안사건에 연루돼 고난을 겪으면서도 지역목회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김 목사는 2016년 ‘제10회 오월어머니상’을 받았다. 광주 5.18단체인 (사)오월어머니집이 시상하는 이 상은 국적에 관계없이 한국의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희생을 했거나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주는 의미있는 상이었다.

김 목사는 또 2019년 9월 ‘민중신학·마르크시즘·주체사상간의 대화’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 목사는 논문을 통해 남과 북의 종교적·사상적 만남을 통해 한반도에 실사구시(實事求是)적 화해와 평화를 구현해 나아갈 것을 제안했다.

김병균 목사는 “지난 70여년간 냉전과 대결상태에 있던 한반도에서 남북화해와 평화통일로 나아가는 길목에는 이데올로기와 사상적 갈등이 암초가 되어 왔다. 남측의 민중신학과 북측의 주체철학간의 신학적 사상적 만남을 통해 이 땅에 평화를 구현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밝히는등 뜨거운 학구열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김 목사는 지난 2019년부터 본지에서 ‘추억의 강진극장’과 ‘강진인간극장사’를 연재하면서 옛 고향에 대한 애정의 끈을 이어왔다. 그는 거주지인 나주의 혁신도시와 고향 강진을 버스를 타고 왕복하며 고향역사를 취재하는 열성을 보였다.

김 목사는 본지에 2019년 7월부터 2022년 6월까지 132회에 걸쳐 장문의 글을 실었다. 강진의 소소한 역사와 사람들, 어릴적 추억을 재미있는 필치로 적은 글이었다. 김 목사는 일체의 원고료도 마다했고, 대기자란 직책을 받고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던 분이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진보애 씨, 자녀 경윤, 유리, 유진 씨가 있다. 김 목사의 유해는 5·18민주광장에서 노제를 올린 후 광주시 북구 망월동 광주시립공원묘지 제3묘역(광주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됐다.     /주희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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