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수/ 광주전남지역 혁신플랫폼 총괄운영센터장

참으로 감회가 새롭다. 책상에서 그리고 있던 키우리가 20년의 거목으로 성장했다니 말이다. 좀처럼 믿기질 않는다. 그동안의 나날을 회고해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1991년 봄 어느 날이었다. 대구에서 산학연구원이 발족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더없이 부러웠고, 우리도 그런 연구원을 하루빨리 만들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된 나머지 전남일보에 칼럼까지 쓰게 되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연거푸 학교 보직을 맡는 바람에 생각을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2002년 8월 광주경영자총협회 금요조찬 포럼에 연사로 초청받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지역경쟁력 강회를 위해 산학협동연구원 설립을 제안하였고, 참석한 경영자들의 적극적인 동의를 얻게 되었다.

당시 광주은행의 엄종대 행장님은 키우리 설립에 적극 찬동하시면서 말바우 시장 건너편 문화동지점 3층의 넓은 공간을 기꺼이 할애해 주셨다.

그 해 12월 광주상공회의소 강당에서 강대권 회장님의 성원으로 창립총회를 열었으며, 곧장 산업자원부로부터 사단법인 한국산학협동연구원 설립허가를 받고 이듬해인 2003년 1월 마침내 키우리호가 출범하게 되었다.

남녘의 산학협동운동이 전국화되기를 염원하면서 광주전남 대신 ‘한국’을 맨 앞에 두어 한국산학협동연구원(Korea Industry University Research Institute)으로 등록하였음도 밝혀 둔다.

이름이 길어 편하게 부를 애칭을 찾다가 영문 명칭의 머리글자를 따다가 ‘키우리’를 만들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명작임에 틀림없지 않는가. 그날 이후 두고두고 불리는 키우리는 이제 더없이 남도에서 사랑받는 이름이 되고 있다.

박광태 광주광역시장님을 1회 연사로 모시고 시작한 산학협동포럼은 238회까지 줄기차게 이어 오면서 키우리 대표 브랜드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회원 정보공유마당으로 창간한 산학협동인포 또한 월간지로 발행되면서 산학협동 네트워킹의 효과적인 매체로 손색이 없는 잡지가 되었다.

이러다 보니 광주전남지역에서 성실하게 중소기업을 경영해온 기업인들이 평생회원으로 앞다투어 가입하면서 회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되었다.

이분들 덕분에 초창기의 키우리는 재정적인 안정을 기할 수 있었고, 아울러 다양한 산학협동사업도 펼칠수 있었다. 1사1교수제 도입으로 상아탑의 연구가 산업현장에 접목될 수 있었고, 회원들 역량강화를 위한 교육훈련프로그램, 세미나, 워크숍 등은 산업계와 학계간의 가교역할을 해주었다.

특히 회원 간의 소통과 협력의 동력이 된 동아리 활동 역시 키우리의 자랑이 되었다. 키우리산악회, 키우리골프회, 키우리독서회, 키우리봉사회, 그리고 키우리 문화예술회가 바로 키우리의 든든한 버팀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보다 앞서가는 대구의 산학연구원 가족을 먼저 초청해서 시작된 1박 2일의 영호남 산학교류행사는 해마다 거르지 않고 진행되어 오면서 우리가 즐겨 쓰는 달빛동맹의 초석이 되었다.

우리 고장의 국제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도입된 해외산업시찰은 코로나시기를 제외하고는 해마다 진행되었다. 가까이는 일본, 중국, 미얀마, 우즈베키스탄, 터키, 그리고 머나먼 아프리카까지 다녀오면서 우리들의 글로벌 역량을 키워 왔다. 회원업체의 현장을 달마다 찾아가는 탐방프로그램과 CEO와의 대화는 회원 상호간에 이해를 증진시키는데 참으로 유익하다고들 말한다.

20년을 한결같이 달려 온 우리 키우리! 앞으로 30년을, 아니 100년을 향해 회원 모두가 합심해서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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