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정/ 이한영차문화연구원장

사람은 이름을 불러 주어야 하듯이 상품은 브랜드를 붙여 주어야 비로소 생명이 부여된다.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人格)을 나타내듯이 상품은 브랜드가 있어야 물격(物格)을 드러낸다. 상표가 없으면 그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을 붙여 주어야 생명을 갖고 정체성이 형성된다. 산에 올라가서도 꽃 이름을 알아야 꽃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나무 이름을 알아야 대화가 된다. 이름을 모르면 그저 ‘꽃인가 보다. 나무인가 보다.’하고 지나치기 마련이다. 

‘백운옥판차’라는 브랜드는 우리나라 차업(茶業)의 브랜드로서는 가장 오래된 상표이다. 1920년대에 지어졌으니 말이다. 목판에다가 로고를 새겨 잉크를 묻혀서 한지에 찍었다. 뒷면에는 매화로 한반도까지 그려 넣어서 말이다.

1920년대, 어떻게 일제강점기 암흑기에 이런 브랜드를 붙일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강진이라고 하는 한반도 좌측 아래쪽의 궁벽한 시골에서 말이다. 

현대 두산그룹의 시작은 박가분(朴家粉)이었다. 상표등록이 1920년으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 상업 브랜드의 효시로 꼽는다. ‘백운옥판차’ 상표도 1920년대 초에 만들어졌으니 ‘박가분’과 비슷한 시기다. 두산은 서울 종로에서 활동한 상인이다.

최신 정보와 산업 동태를 파악할 수 있는 그 나라 수도에서 브랜드를 만들었지만 강진은 완전 시골이다. 시골에서 어떻게 한국 최초의 차상표 백운옥판차가 만들어졌을까.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강진은 그렇게 후미진 시골이 아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강진은 일찍부터 상업도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강진만(康津灣)이라는 천혜의 항구를 끼고 있는 지역이었으므로 고대부터 해상물류의 중심지였다. 제주도, 중국, 일본, 그리고 북쪽의 개성에 이르기까지 바닷길을 통하여 물건을 운반할 수 있는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편안할 강(康)에 나루 진(津)이라는 지명이 암시하듯이 강진은 항해하기에 편안하고 안전한 항구였던 것이다. 해상왕 장보고의 무역본부가 있었던 청해진도 바로 강진만의 입구에 있었다는 점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장보고의 활동 중심도 강진만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고려시대로 넘어가도 역시 마찬가지다. 청자라고 하는 당시 첨단제품이자 아주 고가품을 생산하고 이를 외부에 내다 팔던 무역도시였다. 이런 전통이 조선을 거쳐 일제강점기 때까지 이어졌다고 본다. 

병영상인(兵營商人)이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상인집단이다. 이북에 개성상인이 있었다면 이남에는 병영상인이 있었다는 것이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조선 초기부터 병영이 설치되면서 상주하는 군인들에 대한 물자보급이 필요하였고, 이 병참기지 역할을 하면서 강진은 곡식, 약초, 무기류와 같은 다양한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서 상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병영’이라고 하는 상주 군인집단이 거주했던 지역은 다른 데서 찾아보기 어렵다. 뒤집어 보면 강진이 그만큼 물류가 활발하고 돈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병영을 설치한 것이다.

상업은 곧 물자의 유통, 즉 물류(物流)를 의미하고, 물류를 다루는 집단은 상인집단이 될 수 밖에 없다. 상이집단의 특성은 정보 수집력이다. 물건을 사고 팔기 위해서는 타지역의 유통 정보가 곧 돈이 된다.

역사적으로 상인집단 만큼 외부 정보에 민감했던 집단이 없다. 지금도 글로벌 기업들이 첨단 정보를 가지고 있다. 그런 외부정보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다른 지역에 브랜드 개념이 없던 1920녀대에 강진에서 백운옥판차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정보수집의 핵심에는 병영상인의 상인적 감각에서 백운옥판차 브랜드는 나온 것이라고 보여진다. 강진은 상업을 통해서 외부와 열려있던 지역이었다. 시골구석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백운옥판차 브랜드를 창안한 이한영도 크게 보면 병영상이의 전통 위에 서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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