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국보급 청자 대부분은 6.25 직전 개성박물관에서 피난 온 것이다. 피란 전 개성박물관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소장하던 유물은 고풍스런 청자완형품이 아니였다.

개성박물관에는 작은 청자기와조각이 딱 한점 있었다. 개성박물관 초대관장이었던 고유섭(1905~1944)은 많은 사람들에게 “청자기와 조각은 우리 박물관의 큰 자랑거리이지요.”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청자기와 조각에 대한 개성박물관의 애정은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란 책에 잘 소개돼 있는데, 고유섭 관장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일제강점기때 이야기다.

“고려시대에 청자기와로 정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청자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조선과 중국뿐인데 중국에서는 청자기와에 대한 기록도 청자기와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세계적으로 아주 귀한 유물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깨진 것만 보존돼 있는게 너무 아쉽습니다. 또 어디서 이것이 생산됐는지 아무도 몰라요”

일제강점기에는 고려청자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생산됐는지 구체적인 물증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후로 오랫동안 고유섭과 제자 최순우는 청자기와를 만든 곳을 사방팔방으로 찾았으나 실패했다. 최순우는 나중에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된다. 그는 1964년 제자 정양모와 함께 강진에 내려와 그렇게 스승이 찾던 청자기와를 발견한다.

기와를 찾아낸 곳은 이용희 선생집 마당이었다. 당시 신문들은 대망의 발견이라고 대서특필 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그것을 가늠할 수 있는 말을 최근에야 들었다.

엊그제 문화해설사인 김주례 선생과 식사를 하는데 이용희 실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며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청자기와를 발견한 날 밤, 사당리에서 숙식하던 발굴단이 읍내 식당으로 특별회식을 하러 나왔다.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데 최순우 관장이 조용히 일어났다. 그러더니 사뿐사뿐 승무를 추기 시작했다. 고깔도 없었지만 분명 승무였다. 청자기와를 발견하고 느낀 기쁨은 수도승이 득도할 때 느끼는 법열같은 것이었다. 

이용희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당시 상황을 다시 들었다. 가슴 찡한 이야기였다. 그런 역사가 오늘의 강진청자를 있게 했다. 그때의 기쁨을 오늘이 어려운 모든 사람과 나누고 싶다.   <주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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