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 우호적 관계유지
청나라에 모욕당한 인조임금, 세자의 행동 괴씸하게 여겨

강진을 통해 제주도로 유배살이를 간 소현세자의 세 아들 사연을 알려면 마침 mbc문화방송에세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마의’를 보면 좋다. 소현세자의 세아들이 제주도로 귀양살이가는 과정은 나오지 않지만 전체적인 그림이 나온다.

소현세자는 아버지 인조임금에 의해 죽는다. 드라마에는 손창민이 맡은 ‘이명환’이 인조의 명을 받은 이형익의 사주를 받아 소현세자를 죽인다<사진>.

인조는 소현세자와 세자빈을 죽인 후 후사가 두려워 소현세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 셋을 강진을 통해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던 것이다. 소현세자가 죽은 사연도 기가막히다.

인조는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모살제(廢母殺弟: 모친을 폐하고 형제를 죽임)죄로 쫒아내고 1623년 왕권을 차지했다. 때문에 내부적으로 자신도 누구에겐가 쫒겨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한편으로 인조는 대외적으로 외교적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전통적으로 명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한 가운데 세력이 커가는 청나라와는 배척외교를 폈다. 명나라와 오랜 의리 때문이였다.

유명한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이 그것이다. 그러나 조선을 괴씸하게 여긴 청나라가 결국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4년)을 일으킨다. 인조는 남한산성에 피신해서 삼전도에서 항복을 한 다음 청나라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세 번 이마를 찧어 절하는 ‘삼배고두구례’의 치욕을 당한다.

그 뿐 아니였다.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가 자진해서 세자빈과 동생 봉림대군, 200여명의 인질들과 청나라로 끌려갔다.

소현세자는 중국 심향에서 봉림대군과 함께 9년간 인질로 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꼼짝않고 방에 앉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서 창구역할을 맡아 조선인 포로 도망자의 속환문제를 비롯해 두 나라의 정치·경제적 현안을 맡아 처리했다.

또 베이징에서 선교사를 만나 서양 역법과 여러 가지 과학에 관련된 지식을 전수받고 천주교에 관해 소개받기도 했다. 그는 조선이 현실적으로 명나라를 잊고 선진문물을 가진 청나라를 받아드려야 한다는 입장을 갖게 됐다.

중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사람은 소현세자뿐이 아니였다. 소현세자빈 강씨는 타고난 재주꾼이였다. 강씨는 조선과 교역을 추진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벌었다. 포로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세자빈강씨가 청나라에서 그곳 권부와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은 대대로 명나라와 친교관계를 맺어왔고, 삼전도에서 청나라로부터 치욕을 당한 인조임금과 대신들에게는 괴씸하기 짝이 없는 일이였다.

인조는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즉위시키고 자신을 몰아내려는 공작을 펴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1645년 2월 18일 소현세자와 세자빈, 봉림대군등이 오랜 억류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돌아왔다. 그의 나이 34세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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