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맣게 그을린 청자, 원인은 온도 올리는 방법에 있었다

1977년 청자 재현당시 현장으로 잠시 가보자. 1977년 6월 사단법인 강진청자재현사업추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500만원의 군예산을 지원받아 청자재현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가마외에 청자작업을 위한 공간이 있어야했는데 예산이 부족해 직접 마을 주변에 있던 대나무를 베어다가 하우스 형태로 작업장을 만들었다.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진 작업장과 가마에서 청자재현 사업을 추진했고 조기정 선생과 문하생 등과 함께 청자 재현이 시작됐다.

그해 11월 만들어진 도자기의 초벌구이가 이뤄졌고 이듬해인 78년 2월 본벌구이 작업이 진행됐다. 이때 가마에서 청자를 꺼내는 순간 역풍이 불어 나를 비롯한 현장에 있었던 대부분이 얼굴이 까맣게 그을렸지만 청자재현은 성공적이었다. 이때 가마에서 총 33점의 성공작품이 나왔다.

가마에서 작품을 꺼낸후 점심시간 무렵이 되면서 밥을 먹기 위해 자리를 비워야만 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사고를 위해 대구파출소에서도 순경들이 파견나왔다. 점심시간에 자리를 비워야했기에 현장은 순경 1명이 지키고 있었다.

당연히 총 몇점의 작품인지 정확히 센 후 자리를 비웠다. 잠시후 식사를 끝내고 돌아온 현장에서 청자를 세어보았다. 작품 하나가 사라진 32점만 있는 것이었다. 분실되면 큰일이기에 주변을 찾아보았으나 청자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당연히 현장을 지키고 있었던 순경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잡아땠던 순경이 지속적으로 다그치며 묻자 가마 바로 옆에 있던 초가집의 가마솥에서 청자 그릇을 꺼내왔다. 난생 처음보는 청자재현품에 욕심이 생긴 순경이 가마 바로 옆에 있던 초가집의 가마솥에 청자를 숨겨놓았던 것이었다.

이렇게 첫 시작은 대성공이었다. 이후 사람들의 기대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이후 2~3년동안은 기대만큼 성공적인 청자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뚜렷한 성과가 나오지 않자 군 내부에서도 군비만 낭비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군에서는 추진위원회에 전시회를 제안했다. 이때 조기정 선생은 개인적인 일정으로 인해 전시회에 참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기술담당 이사였던 내가 청자를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먼저 청자가 실패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고민했다. 첫 시작은 성공이었으나 이후에는 실패작이 더 많았다. 맑은 비취빛이 아니라 검정색에 가까운 실패한 청자들만 계속 나왔다.

변화된 점을 찾던중 온도를 올리는 방법에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첫 시도에서는 나무장작만을 이용해 가마의 온도를 올렸다. 하지만 이후부터는 가마의 온도를 쉽게 올리기 위해 기름을 사용했던 것이었다.

나무를 태워 온도를 올리면 탄소가스가 배출되지만 기름을 사용하면 유황가스가 나오기 때문에 유약이 녹는 순간에 색깔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점을 발견하고 나는 곧바로 가마의 불을 때면서 모두 나무장작만을 사용했다.

유약이 녹는 시점의 온도가 약 1천300도 가량이 되어야만 청자의 비취빛이 나오기 때문에 불을 살피는데 정신을 집중했다. 이렇게 2번정도 가마에서 청자를 구워냈다. 이전에는 3~4년동안 전시회에 내놓을만한 작품이 40여점에 불과했지만 가마에 불을 땐지 2번만에 50점정도의 성공작품이 쏟아져나왔다.

약 100여점의 청자 작품이 만들어지면서 무사히 전시회를 할 수 있었다. 이때 전시품 대부분이 사람들에게 판매가 될 정도로 높은 인기속에 전시회가 마무리됐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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