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일간 밤낮 연구 끝에 최적의 유약 배합비율 찾아냈다

1977년 (사)청자재현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되면서 명맥이 끊어졌던 청자 재현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77년 이해 강진에 첫 청자를 굽는 화목가마인 강진요가 설치됐고 그곳에서 청자 재현이 이뤄졌다. 나는 조기정 선생과 노력 끝에 1년후인 1978년 2월 강진요에서 첫 재현품인 청자를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다.

이 성공이후 추진위원회에서 활동했던 나는 사람들의 높아진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청자로 성과물을 내놓아야만 했다. 이 시기 강진에서는 예산 확보와 같은 중앙부처의 협조가 필요한 일이 있을 때면 강진산 청자를 로비활동에 사용하곤 했다. 이때 청자를 선물하면 따내기 힘든 예산도 따올 수 있을 정도로 청자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이 때문에 나는 조기정 선생과 함께 높아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더 좋은 청자들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하지만 첫 성공이후 좋은 청자작품들은 생각만큼 많이 만들어내지 못했다. 비취빛을 내야하지만 색깔이 제대로 나오지 않거나 가마에서 굽는 과정에서 변형되거나 깨지는 바람에 생각만큼 좋은 청자 작품들이 나오지 못했다.

그러자 지역내에서는 여론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많은 예산이 투입되는 청자재현 사업에 돈을 투자한 만큼 성과를 보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나와 조기정 선생은 상당한 압박과 부담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 강진군에서도 성과를 요구하기에 이르면서 전시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렇지만 전시회에 내놓을만한 작품은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최소 20~30여점은 만들어야 사람들에게 전시할 수 있기 때문에 청자를 만드는데에만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비취빛 색깔을 내기가 어려웠다. 조기정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조 선생의 방법을 토대로 나만의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비취빛 색을 내기위해서는 무엇보다 유약이 중요했다. 주변에 알고지냈던 사람들에게 관련 서적을 모아 연구를 했고 이것저것 비율을 바꿔가면서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수일을 연구한 끝에 비취빛을 낼 수 있는 유약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흙으로 도자기를 만들고 직접 만든 유약을 발라 가마에 구워냈다. 얼마 후 가마에서 꺼낸 청자는 대성공이었다. 변형도 많지 않았고 비취빛도 예전에 비해 훨씬 선명해졌다. 이렇게 해서 20여점의 작품을 만들어냈고 무사히 전시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때 전시회를 함께 준비했던 조기정 선생도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강진에 내려와서 비취빛이 선명한 청자 수십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는 조 선생의 작품과 나의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개최했는데 장소는 현재 고려청자박물관이 있었던 자리에서 열렸다. 당시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공터에 건물만 있었다. 그곳에서 청자 작품을 모아 전시회를 개최했고 강진군의 반응도 상당히 좋아 성황리에 전시회가 마무리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때 전시회가 성공을 거둔 덕분에 강진군에서 청자사업이 지속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때 제대로된 청자를 만들지 못해 평가가 좋지 못했더라면 강진군 입장에서는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청자 사업을 포기했을 수도 있었다. 이후 군은사업 예산을 500여만원 수준에서 1천만원으로 크게 올려주었다. 항상 청자를 만드는 도공들은 자신의 작품을 위해 항상 연구하고 노력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정리=오기안 기자>

저작권자 ©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