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살인사건이 1974년 갈갈이 사건으로 둔갑했다

방송 끝난지 48년이 됐는데
지금도 구천의 유령처럼 떠돌아

방송작가가 만들어낸 상상력의 극치
야화수준의 내용이 방송서 사실처럼 전달
많은 사람들 아직도 70년대 초반사건으로 알아

강진의 이미지 심각하게 왜곡
“팩트체크로 이번 기회에 끝내자”

작가 최풍씨가 법창야화 제1화 ‘강진갈갈이 사건’ 성공 이후 책으로 발간한 ‘강진갈갈이 사건’이다. 많은 삽화를 넣었다. 제일 우측은 당시 범인역을 맡았던 변희봉씨다.
작가 최풍씨가 법창야화 제1화 ‘강진갈갈이 사건’ 성공 이후 책으로 발간한 ‘강진갈갈이 사건’이다. 많은 삽화를 넣었다. 제일 우측은 당시 범인역을 맡았던 변희봉씨다.

 

강진갈갈이 사건이 1974년 법창야화 제1화로 방송된지 올해로 48년이 됐다. 2년 후면 50년이 된다.

그러나 ‘법창야화 제1화 강진 갈갈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지금도 유효하다. 요즘같은 휴가철이면 더한다.

외지에서 출향인들이 지금도 그때 얘기를 듣는다며 고향에서 농담반 진담반 꺼내기 때문이다.

그만큼 1974년 법창야화 1화는 강진의 나쁜 이미지를 지금도 만들고 있다. 당시 ‘법창야화 1화’의 문제점을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팩트체크도 해 보자.

■법창야화 제1화의 문제점은
이 사건은 발생시기나 사건내용 등이 방송전달 과정 등에서 심각하게 왜곡됐다. 이 사건은 사건이 사건이 아니라 법창야화 1호가 된 것 자체가 사건이라고 해석해야 할 정도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1974년 4월, 저녁 10시가 되면 전국의 거리가 조용해졌다.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을 때였지만 사람들은 그것과 상관없이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6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 나왔던 금성라디오.
6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 나왔던 금성라디오.

밤 10시 5분부터 MBC라디오로 방송된 법창야화 1화 ‘강진갈갈이 사건’을 듣기 위해서였다.

당시 법창야화 1화 강진갈갈이사건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사건사고가 드라마로 라디오에 방송된게 처음이었던데다, 강진 갈갈이 사건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이 사람들의 귀에 박혔다.

전국의 청취자들이 ‘강진갈갈이 사건’에, 그리고 무엇보다 강진에 관심을 집중했다. 매주 시청자 사은퀴즈가 나가면 10~20만통의 엽서가 쏟아졌다. 당시 라디오 보급률이 98.7%에 달한 시기였다.

그때부터 ‘강진=갈갈이 사건’으로 통했다. 지역주민들도 제발 그일만은 묻어두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법창야화 제1화 ‘강진갈갈이 사건’은 강진사람들이 가장 잊어버리고 싶은 사건이지만 역설적으로 전국의 6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강진을 가장 생생하게 각인시키는 ‘사건’이었다.

그럼 ‘강진갈갈이 사건’은 강진의 이미지를 그토록 철저하게 규정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사건이였을까.

■언제쯤 사건이었나
‘강진갈갈이 사건’은 1939년 10월 군동면 한 야산에서 일어난 치정에 의한 살인사건이였다. 왜 하필이면 1939년에 일어난 강진의 살인사건이 마치 70년대 초반에나 일어난 것처럼 전국의 화젯거리가 됐을까.

우선 ‘강진갈갈이 사건’의 발생 시기에 대해서 살펴보자. “강진갈갈이 사건이 언제 일어난 사건인줄 아십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60년대 후반이나 1970년대 초반사건으로 알고 있다.

외지 사람들도 그렇지만 강진에 사는 사람들도 거의 100% 그렇게 답변한다. 법창야화가 방송된 시기와 사건이 발생한 시기를 일치해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은 일제강점기였던 1939년 10월 30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드라마가 방송된 1973년을 기준으로 34년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는데 마치 엊그제 일어난 사건마냥 전국의 국민들에게 전달한 것이다.

본지가 1974년 4월부터 1980년 10월까지 법창야화로 방송된 47개 사건을 분석한 결과 10년 이상된 사건을 소재로한 것은 2~3건에 불과했다.

그것도 모두 한국전쟁 이후의 사건이였고 나머지는 1974년을 기준으로 모두 평균 5년 이내에 발생했던 사건이었다.

제2화로 방송된 무등산연쇄살인사건은 1968년 사건이였고, 제4화 부산범전동여인숙 살인사건은 1962년 사건이였다.

청취자들에게 강진갈갈이 사건은 당연히 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 초반에 일어난 사건으로 전달됐다. 이렇듯 강진갈갈이 사건은 사건의 발생시기에서부터 청취자들에게 심각한 오류를 전달하며 시작됐다.

당시 법창야화의 기획목표는 ‘밝은 사회건설과 인간회복’이였다. 오래된 사건은 그런 법창야화 기획 목표와도 어울리지 않은 것이었다. 가장 최근의 사건을 취급해야 그것을 거울삼아 밝은사회를 건설하는데 일조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시 라디오의 위력은 막강했다. 1970년대 초반 명지대학교부설 방송문화연구소가 라디오 청취정도를 조사한 결과 각 가정의 라디오 보급률이 98.7%에 달했고, 이중 58.7%가 개인전용라디오를 가지고 있으며 이중 10%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치정과 도박, 폭력등 흥미의 3대 요소를 적절히 가미한 ‘강진 갈갈이 사건’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당시 법창야화에 출연했던 성우중에 지금도 유명한 배우가 변희봉씨다. 그는 전라도사투리를 잘한 덕분에 주인공 역을 맡아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훗날 전문가들은 “살인사건은 다른 측면이 있겠지만 일단 일제강점기때 일어났던 모든 사건은 그것을 사회화 하는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국권이 침탈당하고 주민들의 주권과 인권이 완전히 박탈당한 시기였다.

주민들은 희망을 잃고 끼니때우기도 힘들었던 시기였다. 1939년은 일본의 수탈이 가장 심각했던 때였을 것이다. 당시의 살인사건을 70년대 초반에 드라마화 한 것은 심각한 인식의 혼란을 가져오는 일이였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이었나
당시 신문자료를 보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1940년 5월 23일자에 이 사건을 단순 사실보도 내용으로 1건씩 다뤘다. 그러니까 1939년 10월 30일 사건이 일어난 후 7개여월 만에 범인을 잡은 것이다.

신문들이 보도한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군동에 사는 주민 A씨(26세)는 같은 마을에 사는 B모씨(43)의 내연녀인 C모(31)를 만나다가 이를 여러차례 B씨에게 발각됐다. B씨는 이를 빌미로 A씨에게 수차례 금품을 빼앗고 협박을 일삼자 B씨를 인근 산으로 유인해 살해했다. 이것이 사건의 전말이다.

특이 사항이 있다면, 단순 살인이 아니라 토막 살인사건이었다는 점이다. A씨가 다른 사람이 살해한 것처럼 해 놓고 외지로 나가버렸다는 내용도 나온다.

이 때문에 경찰이 범인검거에 애를 먹었고, 엉뚱한 사람들을 범인으로 체포해 취조하다가 어렵게 범인을 잡았다는 내용이다.

전체적으로 단순 토막 살인사건 이상의 사건은 아니었던 것이다. 또 당시 신문들을 찾아 보면 전국적으로 잔인한 살인사건이 하루가 멀다하게 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법창야화 대본 자료를 수집했나
‘강진갈갈이 사건’을 극화한 최풍(79년 사망)씨는 대본을 당시 사건관계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은 후 적었다고 했다. 재판자료나 검찰의 공소장같은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드라마 대본이 아니였던 것이다.

‘강진갈갈이’ A씨는 1940년 어느날 대구고등법원에서 1심과 같은 살인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된다. 당시에는 고등법원이 대구에 있었기 때문에 광주지법 산하 1심 판결에 대한 항소는 대구고등법원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대구고등법원측은 물론 대구고검, 국가기록원등에도 사건기록은 없다. 독립운동 판결문과 같은 특수한 사건 외에 일반 형사사건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모두 폐기한다는게 당국의 설명이었다. 설령 판결문이 존재하더라도 열람은 불가능한 일이였다. 직계가족이 아니면 누구도 열람할 수 없는 일이였다.

대신 최풍씨가 1974년 12월, 그러니까 법창야화가 그해 4월 시작된 후 6개월만에 쓴 ‘문화방송 연속실화극 제1화 강진갈갈이 사건’이라는 책이 전해지고 있다. 드라마의 인기가 치솟자 대본을 소설형식으로 개작해 책으로 펴낸 것이다.

당시에는 이 책이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만큼 사회적 파장이 컸다. 그럼 최풍 작가는 어떻게 해서 제1화 강진갈갈이 사건의 대본을 만들었던 것일까. 참 한심할 정도로 허술한 과정이 있었다는게 드러난다. 그 내용까지 소개하고 이 주제를 마치는게 좋을 것 같다. <계속>     /주희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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