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돌과 함께 굴러다니던 청자편 잡동사니 취급받았다

나는 1939년 대구면 당전마을에서 태어났다. 현재 고려청자박물관 전시관의 바로 옆 현재 발굴이 이뤄지고 있는 곳이 내가 태어나 자랐던 곳이다.

어렸을 때 대구면 당전마을은 농토가 많지 않고 땅도 비옥한 편이 아니라서 부유한 마을은 아니었다. 내가 어린시절 마을에는 모두 초가집밖에 없었던 기억이 있다.

이때 당전마을은 윗당전과 아랫당전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내가 자란 곳은 아랫당전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이때 백사, 미산, 당전마을이 모두 하나로 당전마을에 속해있었지만 1945년 해방이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각각 마을로 분리됐다.

윗 당전마을과 아랫 당전마을 합쳐서 약 50여가구가 살고 있었고 내가 살고 있던 아랫당전에는 가구수가 많지 않아 9가구 정도가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집은 모두 초가집이었다. 지금과는 달리 이때는 가구수가 많지않았지만 집집마다 최소 5명이상이 살았고 3대이상 함께 사는 것이 보통이었다.

당전마을은 논이 부족하고 밭은 비교적 많았다. 그나마 있는 논도 주변에 물이 부족했기 때문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모내기가 어려울 정도로 농사짓기 힘들어던 곳이다. 대부분 마을주민들은 논농사보다는 밭농사에 의존했고 주로 고구마, 조, 보리 등을 재배했다.

밭작물만으로는 생계가 힘들었기 때문에 미산마을이 위치한 바다를 활용했다. 갯벌에서 바지락이나 굴을 채취해 먹기도 했고 많을 때는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이때는 미산마을도 당전마을에 속해있었기에 바다를 함께 이용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해방이후 마을이 분리됐고 어업권이라는 것이 생겨나면서 분쟁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특히 논농사의 경우 주변에 큰 저수지가 없다보니 물을 공급받기 어려운 말단지역이었다. 그러다보니 비가 내리지 않으면 모를 심을 수가 없었는데 어떤 해에는 물이 부족해 하지가 넘어서 모를 심기도 하는 등 농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당연히 마을주민들의 생활을 어려웠다.

현재 계치마을 입구의 다리 부근에 예전에 보를 막은 적이 있었다. 논에 물을 대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이때 흙을 이용해 보를 막았는데 하천에 가재나 지렁이 등이 많아 구멍이 뚫리기 일쑤였다.

그러다보니 물이 새어나가는 피해가 있어 마을주민들이 황토흙을 지게에 짊어지고 구멍을 막는 공사를 일년이면 여러 차례 실시하기도 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때 새마을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다른 마을들은 대부분 마을안길 포장을 했지만 당전마을에서는 부족한 수로 공사를 했다.

보를 콘크리트로 벽으로 쌓았는데 이 사업이 정부로부터 모범사례로 선정돼 표창도 받고 물도 새지 않아 주민들이 즐거워했던 기억이 있다.

마을주민들은 밭이 많았기 때문에 주로 밭을 개간하곤 했다. 비가 내리면 정수사 부근에서 하천을 따라 큰 물이 내려왔는데 이로 인해 하천과 가까운 밭은 형체를 알수 없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 때문에 수시로 밭에 나가 돌을 치우는 것이 일이었다.

이때 밭에서 돌만큼 많이 나왔던 것이 바로 청자편이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마을주민들은 고려청자가 무엇인지도 알지못했던 때였기에 밭을 개간하는 과정에서 돌과 청자편은 쓰레기 취급을 받았고 동네와 들녘 곳곳에는 골라낸 돌과 청자편이 탑처럼 쌓여있었다.

이 모습은 당전마을에서는 아주 흔한일이었다. 그중 깨지지 않고 형체가 온전한 것은 개밥그릇으로도 사용하곤 했다. 이 시기가 일제강점기때로 먹고사는 일이 중요했고 청자를 몰라서 생겨난 일이었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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