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탐진강·강진만이다

강진의 젓줄·우리의 샘물 상처투성이
강·바다 살려야 우리의 미래도 살아

아주 옛날, 먼 옛날.... 그러니까 호랑이가 담배피던 바로 그 시절. 강진에 강이 있었다. 그 강은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갔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사람이 모여 살았다.

시도때도 없이 바닷물과 민물이 교차하는 곳은 물속에 보물이 있었다. 철따라 고기들이 올라와 알을 낳고 돌아가면, 그 알에서 새끼가 나와 강을 헤맸다. 사람들은 그 고기를 잡아 먹고, 팔기도 하고 그렇게 하며 그렇게 살았다. 강진. 편안한 나루터란 이야기다. 탐진강이 내려와 바다와 만나는 곳. 그곳에 물고기만 사는게 아니였다.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강진만은 좋은 항구였다. 바람이 잔잔했다. 편안했다. 그래서 편안한 나루터, 강진이라고 했다. 수천년, 수만년 전부터 그렇게 바다가 있고 강이 있었다. 우리의 젓줄이였다.

우리의 젓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강 주변에는 넓은 평야가 발달돼 있다. 군동의 기름진 들녘은 탐진강 덕분이다. 바다 주변에는 산이 있다. 동쪽산은 선이 아름답다. 여인의 몸체를 연상케 한다.

서쪽은 울툴불퉁한 바위들이 난리다. 그곳에는 광물이 숨어 있다. 꿈틀거리는 남성의 몸이 떠오르는 곳이다. 강진의 큰 맥의 모습은 강과 바다가 만나 물이 흐르는 곳을 중간에 두고 남녀가 누워있는 형세를 하고 있다. 음양의 조화라고나 할까. 강과 바다가 만나고 음양이 조화로운 강진이다.

그 안에 우리가 살아왔고 앞으로 우리의 후손들이 살 것이다. 그러나 강은 병들어 있고, 바다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탐진강은 사람들이 오염시켰다. 강진만도 사람이 망쳐 놓았다. 그곳에 의지해 사는 강진사람들의 삶도 상처를 입고 있다.

큰뱀이 꿈틀거리며 태평양을 향한다

이제 탐진강과 강진만에 다시한번 고개를 돌릴 때다. 우리의 젓줄, 우리의 탯줄 탐진강과 강진만이 얼마나 아파하고 있고, 어떻게 하면 다시 살릴 수 있을지 고개를 들고 그쪽을 바라봐야 할 때가 됐다.

강과 바다가 오염되고 상처받는 기간은 그렇게 긴 세월이 아니다. 짧았다. 그러니까 70년대 초반부터라고 하면 될까. 증산을 위해 농약을 사용하고, 생활오폐수가 유입되면서 강이 망했다. 바다도 망했다. 수시로 기상이변이 찾아들어 생태계를 흔들어 놨다. 이제 탐진강과 강진만을 살려야 할 때다.

탐진강이 강진만으로 흘러들고 있다. 큰 뱀이 꿈틀거리며 멀리 태평양으로 뻗어나가는 모습이다. 올해는 흑뱀의 해이니 저것은 필시 흑사일 것이다.

일제강점기 전까지, 그러니까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저 강진만은 넓었다. 탐진강이 활처럼 휘어 들어가는 왼쪽 들판, 파랗게 벼가 자라고 있는 곳이 모두 바다였다. 동쪽으로는 군동 삼신리와 칠량 송로리 앞바다가 모두 바다였다. 삼신앞바다에는 넓은 염전이 있었다고 한다. 오른쪽으로는 강진읍 기룡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출렁거렸다.

바다를 메워 논을 만들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식량을 많이 확보할 수 있어서 좋았다. 대신 바다는 좁아졌다. 물의 흐름이 약해 졌다. 퇴적물이 쌓여 갔다. 지금 저 아래 보이는 바다에서 육지 보다 지면이 높은 곳이 상당면적에 달한다.

사진의 중간, 좌우에서 산맥이 내려와 강진만을 막는 모습이 보인다. 동쪽에서 내려 온 산맥은 칠량 구로마을 뒷산 가락이다. 멀리 금사봉에서부터 자락이 시작된다. 서쪽에서 내려온 산맥은 만덕산에서 내려오는 자락이다. 그곳이 해창이다.

이곳에서는 조선시대 세곡선이 출발했다. 양쪽의 산이 강진만 바다를 꼭 항아리 주둥아리처럼 막고 있다. 아무리 큰 바람이 불어도 저 주둥아리가 강진만을 지켜주었을 것이다.

사진의 모습은 바닷물이 많이 빠져 나간 상태를 보여준다. 물이 꽉 차면 강진만은 훨씬 더 넓어진다. 물이 만수위가 되면 바다로 들어가는 탐진강도 훨씬 살쪄 보인다.

저렇게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농토를 얻는 것은 큰 행운이다. 수천년 동안 강을 타고 내려온 퇴적물들이 쌓이는 곳이다. 그래서 강진에는 그렇게 부자들이 많았는지 모를 일이다.
<사진 = 국립광주박물관 ‘강진전’ 도록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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