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발발… 인민군은 8월 1일 풀치를 넘어 강진에 들어왔다

우익진영 민간 경찰서장 선임
기관들 협의체 구성해 전쟁 대비

우익인사들 완도로 피신 계획
해창항에 만약 대비 선박 준비

풀치에서 경찰 최종 방어선
인민군에 무너지자 고금도로 후퇴

무혈입성한 인민군, 강진군청에
강진인민위원회 설치 활동시작

완도군 고군면에서 바라 본 마량항 모습이다. 6.25 발발 이후 인민군이 강진에 들어 오면서 경찰은 고금도, 인민군은 마량쪽에 진을 치고 총격전을 벌였다.
완도군 고군면에서 바라 본 마량항 모습이다. 6.25 발발 이후 인민군이 강진에 들어 오면서 경찰은 고금도, 인민군은 마량쪽에 진을 치고 총격전을 벌였다.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전쟁이 시작됐다. 해방 후 불과 5년도 안된 시점에서 우리민족은 역사상 가장 불행한 비극을 맞아야 했다. 전쟁이 나자마자 강진의 행정기관에서 가장 빠른 변화가 경찰서에서 왔다.

정부가 전국 경찰을 상대로 전투경력이 있는 경찰을 징발하면서 당시 조석원 서장이 7월 2일자로 자리를 떠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강진은 전남도경찰국의 지침에 따라 민간인으로 경찰서장자리를 메꾸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우익진영에서 긴급 회의가 열렸다. 공석중인 경찰서장에 당시 대한청년단장이였던 차부진 선생을 뽑았다. 또 현역 경찰관과 청년단 간부들을 참모진으로 해서 경청연합체제를 만들어 도경찰국과 업무연대 체계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군수를 비롯한 각 기관의 장들은 협의체를 구성해서 인민군이 내려올 상황에 대비하기로 했다.

도암 해창은 우익인사들이 섬으로 피난을 떠났던 곳이다.
도암 해창은 우익인사들이 섬으로 피난을 떠났던 곳이다.

 

그러나 강진에서 경청연합체를 만든지 한달도 안된 같은 달 22일 도청 전체가 후퇴를 해 버렸고 23일부터는 전화연락도 두절되고 말았다. 말 그대로 강진을 인민군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강진 사람들이 알아서 해야 할 판이었다. 전남경찰국은 광주에서 보성일대로 철수한 상황이었다. 이때 전투부대로 차출됐던 조석원 서장도 강진경찰서로 복귀했다.

7월 25일 적의 부대가 열차를 선두로 싸이드카 부대와 함께 남하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때부터 조석원 강진서장이 남쪽으로 이동한 각 경찰서부대의 지휘를 맡게 됐다. 조 강진서장은 장흥서장으로부터 첩보를 받고 27일 새벽 강진경찰서와 장흥경찰서 정예부대 250명을 보성에 투입해서 전격적인 기습작전을 감행했다.

27일에는 관내 각 기관장들이 참여하는 협의회가 열렸다. 이미 사흘전인 24일에 해남지역기관장들과 주요 인사들이 피난을 결정하고 부산으로 피난길을 떠난터였기 때문이다. 북한군이 계속 밀려오는 상황에서 강진에서도 가만히 있을수 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강진읍 덕남항에 배 3척을 준비해서 우선 우익계인 민주진영인사들을 완도의 고금도로 피신시키기로 결정했다.<강진군정 50년사 참조>

강진경찰은 최후의 방어선을 영암군계인 풀치에 두고 경비계장 구서칠이 현장을 지휘하게 했으며 만약을 대비해 마량항에 발동선 2척을 대기시켜 놓았다. 북한군이 밀려오면 경찰병력을 안전하게 철수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28일 오전에는 강진경찰서에 인민군 대규모 부대가 목포, 나주를 거쳐 강진과 장흥을 향해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날 강진의 경찰부대 200여명이 영암쪽에서 넘어오는 북한군을 풀치 일대에서 기습했다. 경찰부대는 처음에는 적에게 큰 피해를 주면서 방어효과를 얻었으나 점차 증강되는 적의 역습을 받아 인명피해가 늘어났다.

설상가상으로 경찰부대가 아군 항공기의 오인사격을 받아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다. 이 전투에서 인민군 30여명을 사살했으나 아군도 4명이 전사하고 수명이 부상을 입는 희생을 겪었다.<강진군지 ‘6.25 전쟁기’. 양영조. 국방부 군사편찬원 참조>

월출산 풀치는 인민군이 들어올 때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졌다.
월출산 풀치는 인민군이 들어올 때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졌다.

 

밀려오는 인민군을 일개 경찰서 경찰들이 계속 막을 수 있는 도리가 없었다. 30일 남은 경찰병력과 지역 우익인사들이 마량항에서 결집해 다음날 꼭두새벽 고금도로 들어갔다. 강진이 인민군에 함락하는 순간이자 힘을 잃었던 좌익인사들이 힘을 얻게 된 순간이었다.

1950년 8월 1일 인민군은 풀치를 넘어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강진에 입성했다. 인민군들은 한 지역을 점령하면 그곳의 치안을 정치보위부이란 조직에 맡기고 다시 다른 지역을 향해 전진해 나가는 형태로 남한지역을 잠식해 갔다.

강진도 마찬가지였다. 8월 1일 강진에 들어닥친 인민군은 정치보위부 직원들이 치안을 접수한 후 군청은 강진인민위원회를 구성해 그들이 군청을 접수하게 했다.

해방 후 미군진주와 함께 해산됐던 강진인민위원회가 다시 복구된 것이다. 당시 인민위원장에는 강진읍시장에서 건어물장사를 했던 강진읍 부춘리 한 주민이 임명돼 활동했다.

정치보위부는 면단위에 분주소라는 파출소 형태의 조직을 구성했다. 이 조직에는 면단위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이 많이 참여했다.

인민군은 강진에 들어온 후 강진군청 건물안에 인민위원회를 설치했다.
인민군은 강진에 들어온 후 강진군청 건물안에 인민위원회를 설치했다.

 

진경찰이 후퇴한 고금도는 인근 5개군의 경찰병력이 집결한 곳이였다. 고금도로 후퇴한 강진경찰은 마량앞바다를 사이에 두고 인민군과 대치했다. 고금면 가교리에 강진경찰과 화순경찰 중대본부가 차려졌다. 마량앞바다를 사이에 두고 거의 매일같이 총격전이 벌어졌다.

당시 11살이었던 오송자(서울시 동작구 거주. 완도 고금도 출신)씨는 “경찰들이 가교리 우리집으로 후퇴해 와서 제사 지낸 음식, 술, 밥, 고기등을 모두 잡수셨고 그날부터 우리집은 강진부대 중대본부가 되었다”며 “우리 옆집은 화순부대 소대본부가 주둔했고, 건너마을 외갓집 할아버지댁에는 대대본부가 주둔했다”고 회고했다.

오씨는 또 “건너편 마량에서는 인민군이 주둔해 날마다 고금도를 향해 총을 쐈고 이쪽에서도 마량을 향해 총을 쐈다”며 “당시 고금면이 지금처럼 육지였다면 우리 경찰관들은 한 사람도 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민군은 장군봉 아래에 진을 치고 고금도에 상륙하기 위해 어부들의 배를 징발해 마량항에 집결시켰다. 이를 감지한 경찰이 공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공군기들이 왔다. 그러나 공군기들은 숙마마을의 배수갑문을 배로 오인해 이곳을 폭격하는 바람에 엉뚱한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얼마후 완도가 인민군의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고금도에 있던 강진경찰은 다시 청산도로 후퇴를 거듭해야 했다. 당시 피난을 떠난 사람들은 경찰과 우익단체 인사들 만은 아니었다. 강진의 주민들도 피란길에 올랐다. 주민들 중에 소위 갑부로 통하던 사람들은 6.25가 터진 후 좌불안석이었다.

인민군들이 부자들을 골라 재산을 빼앗고 인민재판을 해서 죽임을 강요한다는 소문이 진즉부터 돌았기 때문이다. 인민군이 영암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강진의 유지들은 피난갈 채비를 서둘렀다. 군동면장등을 역임했던 차종채씨가 강진의 갑부들을 모아 놓고 섬으로 피난을 가자는 의견을 내놨다.

차씨의 계획에 동조해 강진의 유지들이 상당수 피난배 위에 올랐다. 30톤급 풍선에 오른 사람들은 50여명. 차종채선생과 목리의 유재희씨, 신청순씨, 이일순씨등 당시 내로라한 사람들이 모두 차씨의 배를 타고 피난길에 올랐다. 여자들도 10여명이 배에 올랐다.

백금포에서 출발한 피난선은 마량을 거쳐 완도 금일도로 들어가 다시 청산도에 도착했다. 그러나 청산도 역시 안전한 곳이 아니였다. 차종채 선생이 “더 안전한 삼도(거문도)로 들어가 버리자”고 했다.

거문도는 청산도에서 동남쪽으로 35㎞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그들은 바다 한가운데서 갑작스런 태풍을 맞고 죽을 고비를 맞으며 간신히 거문도까지 피난길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강진에 남아 있던 우익인사들이였다. 마량에서 경찰과 인민군의 전투가 계속되고 있을 때 좌익들에 의한 강진에 남아 있던 우익 인사 토벌은 빠르고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게 8월 4일 강진오일장에서 열린 차래진 국민회장과 부회장이였던 배영석 목사, 칠량청년단장 황호윤등 10명에 대한 인민재판이었다.<계속>           /주희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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