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6.25는 해방 직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방 다음날 강진건준위 출범
한달 후 지방인민위원회 조직

미군 들어 온 후 치안활동
좌우익 갈등 일정부분 봉합

1948년 여순사건 발발 후
좌우익 갈등 본격화

6.25 한달전 성전 수암사건 발생
죽고 죽이는 보복 악순환 시작

1945년 11월 23일 미군이 강진에 들어와 본부를 차린 후 강진의 우익인사들과 찍은 사진이다. 지금의 강진읍 동성리 새마을금고 좌측 자리이며, 미군 2명  뒷편 중간에 서있는 사람이 차부진 선생이다.
1945년 11월 23일 미군이 강진에 들어와 본부를 차린 후 강진의 우익인사들과 찍은 사진이다. 지금의 강진읍 동성리 새마을금고 좌측 자리이며, 미군 2명 뒷편 중간에 서있는 사람이 차부진 선생이다.

 

오는 16일은 6.25 73주년이 되는 날이다. 1950년 6월, 그때 강진은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이미 좌익과 우익이 갈라져 수 많은 희생자가 나오고 있었다. 수많은 갈등이 있었고, 수 많은 죽음이 있었다. 그때로 돌아가 보자.

6.26가 발발하기 불과 한달 전인 1950년 5월 22일 성전 오산마을. 무장한 빨치산들이 이날 밤중에 수암마을과 명동마을, 오산마을을 공격했다. 명산리 명동마을서 집한채가 불탔고 3명이 총을 맞고 숨졌다.

오산에서는 5명이 죽었다. 신기마을에서는 집한채가 불타고 3명의 민간인이 숨지는 등 11명의 주민이 총을 맞고 사망했다. 이 사건은 ‘50년도 수암사건’으로 지금도 주민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6.25는 6월 25일에 발발했지만 강진의 6.25는 해방 직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해방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 강진에서는 다른 지역에 발맞춰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된다. 건준의 구성원들은 대부분이 보수적 인사들이었다. 이어 한달도 못된 9월 6일 역시 다른 지역에 발맞춰 지방인민위원회가 조직됐다. 인민위원회 구성원들은 대부분 진보적 성향이었다. 이 과정에서 좌익과 우익이 치안 주도권을 놓고 갈등을 벌이기 시작했다.

11월 23일에 미군이 진주해왔다. 20여명의 미군들은 지금의 강진읍 동성리 새마을금고옆 건물에 본부를 차렸다. 일체 치안권이 미군에 귀속됐다.

이처럼 11월 경에 미군이 진주하고 행정의 모든 업무가 미군에게 이양됨으로서 강진건준과 치안대는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이 조직에 관계하였던 지방인사들은 그해 12월에 조직된 대한독립촉성(이하 독촉으로 약칭) 국민회, 독촉 노인회, 독촉 부인회, 독촉 청년단 등 우익진영의 각 단체에 귀속하였다.

그렇게 좌우익의 갈등이 잠잠해 지는 듯 하더니 1948년 10월 19일 큰 사건이 터졌다. 여순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여순사건은 제주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여수에서 출발하기로 했던 14연대가 일으킨 사건이다.

14연대의 주력부대가 순천을 점령하고 인근지역으로 병력을 파견하여 동조세력을 모으는 과정에서 강진에도 14연대 잔류병력이 들어왔다. 이들의 병력은 불과 50여명을 넘지 않았으나 각 지역에 형성돼 있던 남로당원들이 합세하면서 세력이 확산일로였다.

당시 대한청년단장을 맡고 있던 차부진선생이 지방단체인 부인회와 노인회, 청년단을 모아 ̒반란̓에 대응하기로 했다. 이들은 산하에 전투원 3개소대를 긴급대기조로 편성해서 경찰전투력을 지원하고 면지역 조직에 위험사태가 발생할 경우에도 전투원을 투입하기로 하는등 사실상 전시체제를 형성했다. 이들은 현장을 지휘할 막사까지 설치했다.<김기삼. 강진군의 민족해방운동사>

이때부터 경찰과 대한청년단을 중심으로 한 공권력과 여기에 항거하는 무장세력간에 죽고 죽이는 혈육전이 벌어진다.

1948년 12월 하순의 일이였다. 대한청년회 성전면단부가 성전수암산에 공비가 왕래한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보고했다. 전투경찰부대와 청년단전투부대 1개소대가 출동했다. 이들은 수암산 계곡에 매복해 있다가 16명의 공비를 사살한다. 공비들도 즉각적인 보복에 나서 수양리와 명산리 일대를 밤에 공격해 초소근무요원 9명을 사살했다.

이때 사살된 공비들이 강진 사람들은 아니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로 여순사건에 가담했다가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장흥 가지산이나 영암 월출산 자락으로 숨어든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9년 2월에는 월출산에서 공비 2명이 사살됐다.

월출산에서는 이밖에도 공비토벌작전이 수시로 벌어져 총격전이 벌어졌고, 공비들의 은신처를 없앤다며 여기저기 산을 불태웠다.<강진군정 50년사 참조> 또 같은달 28일에는 경찰이 강진읍 춘전마을에 남로당 강진군위원회가 조직돼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곳을 습격, 8명을 체포했다.

1949년 7월 초 강진경찰은 수암, 군동, 옴천 등을 습격한 100여명의 좌익들이 은거하고 있는 곳을 파악하고 기동대원을 동원해 장흥 주둔군의 지원을 받아 병영면 접경인 유치면 신월리 월광마을 뒷산 거무실골을 습격했다.

7월 25일 오전 5시부터 오후 4시끼지 10여시간에 걸쳐 적의 아지트 14개를 파괴했다. 당시 전과는 사살 15명(여자 2명 포함), 포로 2명(여자 1명 포함), 아지트 14개 파괴, 카빈 1정, 실탄 30발, 엠원 총 실탄 48발, 쌀 5가마니, 솥 20개, 식기, 도구, 의류품, 불온문서 등을 다수 압수하였다.

우익세력의 강화에도 불구하고 이에 저항하는 좌익세력들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성전 수암산 일대는 6.25 직전 경찰과 빨치산의 총격전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났다.

1950년 음력 2월 어느날 성전 수암마을 한 주민이 장흥 유치에서 공비 13명을 초대해 점심을 먹였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있는 동안 이들을 성전지서에 고발해 버렸다. 군인과 경찰이 곧바로 출동했다.

식사중 총격을 받은 공비들은 현장에서 11명이 사살되는 피해를 입었다. 한명은 실종됐고, 1명은 작천의 한 마을 논길에서 발견돼 작천지서로 끌려갔다.

성전 수암마을에서 11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본 빨치산들은 두달 후 공비들이 보복을 하고 나섰다. 이 글의 시작부분에 서술한 ‘수암마을 사건’이 일어난 이유다.

6.25가 일어나기 1년전 1949년 6월 5일, 이승만 정부는 국민보도연맹이라는 관변단체를 조직한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인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이 발발했다. 6.25전쟁은 남과 북 동족간에 일어난 비극이자, 남한내에 상존해 오던 좌우대립의 갈등을 폭발시킨 사건이었다. 

북한군이 밀고 내려올수 있다는 정보를 얻은 이승만정부는 보도연맹이 크게 부담스러워 졌다. 과거 좌익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북한군과 합류할 경우 전세가 크게 불리해질 것이라는 판단때문이었다. 결국 이승만은 보도연맹원들을 조직적으로 제거할 것을 지시했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스스로 공산주의를 자임한 족쇄를 찼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조치로 전국적으로 적게는 20만명, 많게는 50만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 때 강진에서는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강진역시 보도연맹 학살당시 수많은 주민들이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중에서 대구 수동리의 피해는 강진에서 규모가 가장 큰 것이였다. 일제강점기부터 사회주의가 유입됐고, 학생운동과 농민운동을 통해 공산주의가 확산됐던 대구 수동마을은 보도연맹 가입 대상 일순위 마을이었다. 주민들은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고 일정한 생필품도 지원받는다는 권유를 받고 상당수가 보도연맹에 가입한 상태였다.

1950년 6월 29일부터 강진에도 보도연맹 학살이 시작됐다. 성전에서 수암사건이 일어난 한달후의 상황이었다. 경찰들이 보도연맹 명단을 들고 각 마을을 쓸고 다녔다. 가장 우선적인 표적은 ‘강진의 모스코바’ ‘공산주의 못자리’ 대구 수동마을이였다. 보도연맹원을 죽인다는 소문이 돌면서 몇몇 주민들은 월출산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은 경찰에 의해 체포돼 5월 29일 풀치에서 6명의 수동마을 주민들이 총살당한다. 그들의 이름은 윤재산, 윤재권, 윤재열, 윤충열, 윤재봉, 윤충현이었다.<대구 수동마을 독립운동 관련자 명단. 대수 수동마을 주민 윤중관, 윤영규씨 제공>

이어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윤창현이 학살당하는 등 보도연맹과 관련해서 재판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숨진 수동마을 주민이 26명에 달했다. 이들 중 윤응하, 윤의현등은 쇠사슬에 묶여 바다에서 사살당하는 참변을 당한 사람들이다.

수동마을 뿐 아니라 다른 읍면지역에서도 단지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 항일독립운동의 수단으로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좌익과 우익이 첨예한 대립양상을 띠며 그 열기는 갈수록 더해갔다. 해방직후 초반에 승기를 잡았던 좌익들이 강진에 미군이 도착한 후 힘을 잃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해방 1주년 기념식에서 좌익계열 농민들이 강진경찰서를 공격하는등 두 진영의 기싸움이 날로 거세졌다.<계속>                        /정리=주희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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