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만들던 강진사람들 진즉 산화코발트 찾았을지도

고려시대 아라비아상인들이 건너와 고려사람들과 거래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아랍상인들 강진오가며 회회청 소개했을 가능성도

조선시대 청화백자의 안료였던 회회청(回回靑)이 소량이나마 강진에서 채취됐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청화백자가 중국에서 들어오기 전 조선사회에서는 회회청(산화코발트)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회청 자체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를 때였다. 그런데 남쪽 땅끝 강진현에서 회회청 비슷한 광물이 나왔고 이를 시험해 보니 청화백자의 가까운 색깔이 나왔던 것이다.

강진사람들은 이미 회회청의 씀씀이를 알고 있었다는 것일까. 강진은 고려시대 수백년 동안 청자를 구웠던 곳이였다. 상감청자를 만들었고, 청자의 그림을 내는 각종 안료 채취가 발달했던 곳이였다. 강진의 도공들은 산화코발트를 이미 고려시대에 발견해서 그것을 청자에 적용하는 방법을 연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한가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회회(回回)가 아라비아, 즉 아랍국가를 나타내는 의미라는 것이다. 회회는 또 서역인(西域人), 대식인(大食人) 등으로도 불린다. 이들은 이미 6세기경에 한반도의 남쪽지역을 오간 것으로 확인된다.
 
2003년 함평군 창서유적에서 발굴된 6세기 제작 토기에 아랍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기도 했다. 또 6세기 경에 아랍상인들이 대구면의 하저에 왔다 갔다는 주장도 있다. 다른 기록은 없지만 이후에도 아랍상인들이 어떤 형태로든 강진을 포함한 서남해안 지역을 왕래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때 산화코발트가 강진지역에 소개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왕실에서 그토록 찾던 회회청이 강진에서 나온다는게 확인되고 실제 실험을 해서 중국것과 비슷한 성능을 가진 것으로 판명됐으나 크게 상용화되지는 못했다. 아마도 그 양이 미미했거나 궁극적으로 품질이 아라비아의 것에 못미쳤을지 모를 일이다.

결국 국내에서 회회청을 다량으로 확보하는데 실패한 조선왕조는 직접 중국과의 무역을 추진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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