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순학/ 전 강진군청 기획홍보실장

극심한 봄 가뭄에 활기를 띠지 못했던 봄꽃들이 며칠째 내린 제법 많은 양의 단비를 맞고 꽃망울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정원 한켠 양지바른 담장 아래 일찍이 개화한 매화꽃은, 화사한 봄을 알리는 전령사 역할을 하더니 봄비를 맞아 꽃비가 되어 흔적을 감췄다.

따듯한 기온이 연일 이어지는 바람에 동백나무가 꽃망울을 터트렸다. 벌이 꿀과 화분(花粉)수집을 위해 열심히 역사하는 모습에 시샘이라도 한 듯, 후박나무 우듬지에 앉아있던 삔추 녀석이 잽싸게 날아와 동백꽃 속에 묻힌다. 동박새와 더불어 동백꽃을 수분시키는 역할을 하는 새다.

동백나무를 볼 때면 고향마을 뒷동산 동백숲이 아른거린다. 수백 년 수령으로 추정된 30여 그루 동백나무가 5백여 평의 동산을 에워싸고 있다. 이곳은 유년 시절 뒷동산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즐겁게 노는 놀이터였다.

이맘때가 되면 초등학교 수업을 마치자마자 책보자기를 집에 던지고 누가 먼저일세라 친구들과 함께 동산으로 달려가곤 했다.

친구들은 호랑(호주머니)에 동백꽃의 달콤한 꿀을 빨아 먹기 위해 가느다랗고 속이 비어 있는 긴 시누대를 지녔다. 요즘처럼 오락가락 가랑비가 내릴라치면 빗물이 동백꽃 속으로 스며들어 이를 긴 막대기로 꿀을 빨아 먹었다. 이때 꿀맛이란 형언할 수 없는 맛이었다.

동백꽃이 지고 나면 잎사귀에 버섯같이 둥그렇고 하얗게 생긴 동백나무떡이 열렸다. 동백나무떡은 아이들의 간식거리였다. 약간 신맛이 나고 맛은 별로 없었다. 허기지던 시절 친구들보다 하나라도 더 따먹기 위해 쟁탈전을 해가면서 높은 가지에 올라, 하나를 따 입에 넣을 때 맛이란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그 맛을 알지 못하리라.

지금 생각해보면 동백나무떡은 식물 균사체인데도 그것을 먹고도 배 아프지 않았다. 생각건대 동백나무떡은 병을 유발하지 않은 균사체가 아닐까 싶다. 이렇듯 동백나무 동산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현대산업사회 시대 이전 농촌은 어른 아이 구분없이 노동력을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아이들의 노동력은 아침 등교 이전에 염소나 소를 초지로 끌고 가 말뚝을 박아 매달아 놓고 난 뒤, 하교 후에 저녁 소먹이로 깔망태를 채우는 일이었다. 또래 아이들은 깔을 베기 위해 동백나무 동산에 모여 실컷 놀다가, 해질녘이 되면 낫치기 등 깔 따먹기를 했던 곳이기도 했다.

더욱이 동백나무의 아름다운 모습은 푸르른 잎에서 새순이 돋아나는 붉으스레한 환상적 색감이다. 가냘픈 연한 잎과 색상은 어디에서 발색되는지 자연의 신비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때쯤 동산의 동백나무숲에는 개고마리 새와 삔추가 오밀조밀한 가지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고 품는 시기이다. 개고마리 새는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새이지만 6~70년대 까지만 해도 시골 숲속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새였다.

개고마리는 몸집은 다소 크고 둥그렇게 생겨 다른 새들과는 확연히 도드라지고 울음소리가 아름다웠다. 얼마나 좋아했던지 동백나무 가지 둥지에서 새끼 한 마리를 가져와 집에서 정성껏 키웠다.

그러나 허름한 새장 탓에 밖으로 날아가 버린 일이 발생한 뒤 얼마나 애석해했는지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산을 오를 때면 주변을 살피며 혹여 개고마리 새가 있는지 산에 오를 때마다 살펴보지만 안타깝게도 찾아볼 수 없다.

개고마리 새가 많았던 시기에 학창시절 배우고 외웠던 조선조 시대 남구만(1627~1711)이 지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놈은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넘어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라는 보듯 종달새(노고지리)라는 새가 흔했다. 주로 민둥산에서 서식하는 종달새는 울창한 나무숲보다는 허허벌판이라는 말에 어울리듯 민둥산으로 에워싸여 있는 곳에 주로 서식했다.

나지막한 구릉에 둥지를 튼 종달새는 알을 지키기 위해 하굣길에 나선 초등학생들의 시끌벅적한 소리에 수직으로 올라 상공에 정지하며 울어대기 일쑤였다. 덩달아 주위에 있던 녀석들도 수직으로 이륙하여 함께 울어댔다. 청아한 새소리와 함께 어우러진 풍경을 생각하면 그 시절 아름다운 풍경이 그리워지곤 한다.

개고마리 새와 인연 깊은 동백나무는 여름에서 추석 무렵까지 표피가 붉게 잘 익은 동백 열매를 채취하거나 가을에 떨어진 열매를 거둬 동백기름을 짜내어 할머니와 어머니 머릿기름 사용 등 자가용을 제외한 기름은 5일 시장에서 돈사기도 했다.

동백나무는 충청 이남지역 등 주로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분포된 상록수로서 방화선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백련사 천연기념물 동백림과 대구 수동마을 동백숲, 성전 신안마을 풍양조씨제각동백숲, 작천 남평문씨 상곡사내 동백나무, 군동 금사리 언양김씨제각 겹동백 등이 강진을 대표할만한 동백나무가 현존한다. 특히 지명으로 동백나무와 연관이 깊은 칠량면 동백마을이 있다.

수 백년 동안 동백나무와 함께 터전을 일구어 온 우리 강진군은 군화(郡花)가 동백꽃일 만큼 강진을 대표하는 상징의 나무이자 꽃이다. 도로변 산자락 또는 등산로에 식재된 동백나무를 잘 가꾸고 보살피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아니 되겠다. 식목일 즈음하여 동백나무 한 그루 정성 들여 심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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