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진 / 광주교대 교수

 지금으로부터 3백 년 전에 조선의 한 선비가 강진을 여행했다. 그 선비는 충청도 출신 이하곤(李夏坤:1677~1724)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병영성 동문 밖에 군인 집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장인을 위문하기 위해 1722년(경종 2) 11월에 왔다가, 무려 20일 동안 강진 곳곳을 여행하며 갖가지 기록을 남겼다. 일종의 ‘강진 역사문화 답사기’를 남긴 셈인데, 이제부터 그 기록을 따라 옛날로 들어가 보자.

  병영성 성문과 강진성 누각
  그는 먼저 병영성에 들어가 공북루(拱北樓:북문)와 진남루(鎭南樓:남문)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진남루의 단청은 선명했다. 현재 진행중인 복원이 완성되면 성루에 올라 멋진 글을 짓는 이가 나올 것이다. 이어 인근 죽림사(竹林寺:현재 위치 불명)에 들어가 현지 여러 사람들이 베푼 환영회에 참석하여 연포탕을 먹었다. 희미한 탱화가 오래된 절임을 알려준다.

  병영 우후(虞侯:병사 다음 관리)의 안내로 수인산성의 몇 구비 도는 가파른 돌길을 따라 가마를 타고 수인사(脩因寺)에 이르렀다. 병영 기생 몇 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춘면곡(春眠曲)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호남 지방에서 유행하고 있는 이 노래를 들으면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다는 말만 들어왔는데, 여기서 직접 듣게 되었다. 걸어서 석문암(石門庵)에 들렀다. 절벽 낭떠러지에 임하고 있어 시야가 넓고 탁 트였다. 여러 산들이 구름 사이로 보이고, 해안선이 띠처럼 나타나고, 병영성이 달과 같이 둥글게 보였다.

  천년 고찰의 정취
  백련사(白蓮寺)에 이르러서는 만경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스님이 설명해주는 이 절의 삼절(김생 글씨, 동백, 신라 때에 축조한 석축)을 보고 감탄했다. 신라의 명필 김생이 썼다는 ‘만덕산백련사’ 글씨를 보고는 혹 진필이 아닌지 의심을 갖기도 했다. 그냥 지나치지만 않고 고증을 해보려는 조선 선비의 의지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절 뒤에 있는 세심암(洗心庵)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목과 대나무가 이룬 숲은 나그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정약용이 혜장(惠藏)이라는 승려를 찾아가 첫 대면한 곳이 바로 만덕사 세심암이었다. 

  강진 읍내에 들어가 청조루(聽潮樓)에 올라 강진만을 감상하니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객사 남쪽에 있던 청조루는 여러 방문객들의 시에 등장한다. 정유재란 때에 소실되었다가, 중간에 복원되었던 것 같다. 현재는 없으니, 복원하면 어떨지. 강진은 토지가 비옥하여 살기가 좋고 수확이 풍성하고, 길 다니는 사람들 제주말 타고, 반찬으로 숭어를 먹고 있었다. 원님이 내놓은 남도 밥상을 뒤로 한 채 길을 나섰다.

  포구의 사람 냄새
  일찍이 가전 문집을 통해 알고 있던 남당포에 이르러서는 김선연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샜다. 남당포는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사라지고 없지만, 한때는 서남해를 주름잡던 강진의 최대 항구였다. 별과 달그림자가 수놓은 호수의 야경은 기이한 풍경이었다. 출항제를 지내는지, 장사배에서 밤새 두드리는 북소리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조반에 김씨 주인이 내놓은 달작지근하고 연하면서 소반만한 전복 구이를 맛보니 천하 절미였다. 선친이 암행어사로 남당포에 잠입하여 그곳에 남긴 일화를 포구 숙박집 주인으로부터 듣고 감회에 젓기도 했다. 그는 「남당가(南塘歌)」라는 시를 지어 남당포의 정취와 풍경, 그리고 바다와 연관된 주민들의 일상 삶을 매우 소상히 읊었다. 

  선비 정원의 운취
  그는 귀향길에 폐허가 되어 인가가 들어선 월남사(月南寺)를 보았다. 백운동(白雲洞)의 이언렬 별서에 들렀다. 동백꽃 사이로 물을 끌어들여 만든 구비 돌아가는 물길은 운치를 더해주나 폐허된 지 오래 되었다. 이후백이 살았던 안정동(安定洞)의 이씨 정자도 들렀다. 무위사(無爲寺)에 들러 필법이 기묘한 관음상 벽화와 선각대사비를 자세히 살폈다. 

  그가 남긴 강진의 풍경은 80년 후 이곳에 유배온 정약용에게도 그대로 목격되었다. 오늘날 사람이 남긴 기록에는 다산 초당과 영랑 생가가 추가될 것 같다. 세월이 쌓이면 이야기도 느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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