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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으로 본 강진정치사]제4대 국회(1958.5.31~19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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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2.20  23: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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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선거구 김성호, 김향수, 양병일, 차종채 입후보
49.1%인 1만9천279표를 득표 김향수 당선
   
김향수 의원
양병일 두 번째 낙선, 김성호 재선실패

제4대 총선은 1958년 5월 2일 실시됐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반발해 4·19혁명이 일어나 1960년 6월15일 헌법이 개정(3차 개헌)되고 부칙에 따라 임기가 단축되는 바람에 4년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실제 임기는 2년1개월28일.

선거구제는 3대 국회와 마찬가지로 1선거구에서 1인씩 선출하는 소선거구제가 유지됐다. 선거구는 3대 때의 203개 보다 30개 선거구가 늘어나 모두 233개 선거구에서 의원을 선출했다. 전남지역도 3대 총선 때보다 2개 선거구가 늘어나 32개 선거구가 됐다.

선거결과, 의석수는 모두 233석 중 자유당 126석, 민주당 79석, 무소속 27석, 통일당 1석 등으로 자유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자유당이 희망했던 개헌을 위한 의결정족수에는 미달했다.

4대 국회는 짧은 임기였지만 정치 소용돌이가 거셌다. 이승만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꾀한 자유당은 1958년 12월 비판적인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야당의원들을 옥죄기 위해 반공체제 강화를 명분으로 국가보안법 개정을 추진했다.

자유당은 무술경찰 300명에게 국회 경위복을 입혀 본회의장에 투입, 야당의원들을 끌어내도록 한 후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른바 ‘국가보안법 파동’이다.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은 1960년 실시된 3·15 정·부통령선거에서 온갖 불법선거운동을 동원하여 재집권을 시도했다. 그러나 분노한 시민과 학생들이 자유당 정권의 부도덕성을 규탄했던 시위(4·19혁명)가 전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고,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했다.

‘3.15 부정선거’는 결국 자유당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제1공화국도 막을 내리는 계기가 됐다.

 
보통학교 은사등 지역민들 강력한 출마 권유
‘경제 살리겠다’ 이향수 후보 전략 유효 

 
   
 
4대 총선은 자유당 정권의 온갖 불법선거가 난무했던 선거였다. 자유당의 횡포는 지역을 가리지 않았다. 곳곳에서 야당 선거운동원들이 산림채취, 밀주, 징병기피, 가축도살 등의 혐의로 구속되었고, 공포에 질린 국민들은 유세장에도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4대 총선은 야당 탄압과 관권개입이 극에 달했던 선거였다. 대리투표와 암호투표가 횡행했고, 후보 등록방해도 노골적이었다.

강진에서도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는 다른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군민들이 젊은 사업가인 김향수 사장이 미국과 유럽여행을 끝내고 귀국했을 때 서울에 올라가 강진에서 자행되고 있는 자유당 횡포를 전하면서 총선 출마를 권유했을까?

강진군 선거구(제19선거구)에는 김성호(金聲浩·58, 자유당) · 김향수(金向洙·45, 무소속) · 양병일(梁炳日·48, 민주당) · 차종채(車鍾彩·68, 무소속)후보 등 4명이 입후보했다.

이번 선거는 금배지에 도전한 4명의 후보가 나름대로 지역에서 알려진 명망가들이어서 선거 초반부터 치열한 4파전으로 전개됐다.

김성호 후보는 요즘 표현으로 하면 강진에 ‘전략공천’을 받아 3대 의원을 지낸 자유당의 실세 의원이었고, 민주당 공천을 받은 양병일 후보는 2대 의원을 지낸 변호사 출신이었다.

차종채 후보 역시, 지역에서 알려진 부호인데다 일정시대 도의원을 지냈었고 3대 총선(등록 취소)에 이어 두 번째 도전이었다. 김향수 후보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업에 성공해 지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어 다크호스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강진선거구 제4대 총선 입후보자 명단>

이름

(나이)

주소

직업

학력 및 경력

소속정당 단체명

득표수

(득표율)

김성호

(58)

강진군․읍 남성리

136

변호사

의원

일본대 법대 졸, 조선변호사시험 합격, 전 전남도의원, 3대 의원

자유당

4,933

(12.6%)

김향수

(45)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

153-2

무역회사 경영

미국․유럽 시찰, 경성일출상업실습학교 수학, 국제연합한국협회 전문위원

무소속

19,279

(49.1%)

양병일

(48)

광주시 금남로4가 23

변호사

일본 중앙대 법대 졸, 고시 사법과 합격, 변호사,

2대 의원

민주당

15,042

(38.3%)

차종채

(64)

강진군 군동면 호계리

873

농업

금릉사립학교 졸, 금융조합장 14년, 군동면장,

일정시 전 전남도의원

무소속

사퇴

※명단의 내용은 입후보 당시 선거관리위원회 기록임


법정 선거운동 기간은 지금보다 두 배나 긴 32일. 선거전이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선거판도가 달라졌다. 초반에는 김성호 후보와 양병일 후보가 우세한 가운데 4파전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선거 중반에 접어들면서 차종채 후보가 김향수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돌연 후보를 사퇴, 전·현직 의원과 젊은 사업가 출신 후보 간 3파전으로 전개됐다. 이에 앞서 김향수 후보는 후보등록 직전에 불출마를 한 예비후보 4명으로부터도 지지선언을 받아내 선거운동에 탄력이 붙은 상태였다.  

김향수 후보는 합동유세 때 세계여행 경험담을 최대한 활용해 군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김 후보는 “우리나라 장래를 위해서는 중상모략을 일삼는 전문정치인들보다는 차라리 나처럼 경제건설을 통해서 오랜 빈곤의 역사를 추방하고, 경제부흥으로 평화적 남북통일의 주도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믿는 실천경제인에게 한 표를 달라”고 호소했다. 

선거 결과는 정치신예 김향수 후보의 여유 있는 승리. 김 후보는 유효투표수 3만9천254표 가운데 49.1%인 1만9천279표를 득표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2위는 양병일 후보. 그는 1만5천42표(38.3%)를 득표해 3대 총선에 이어 또다시 재선에 실패했다. 현역 의원이자 집권당 후보였던 김성호 후보도 4천933표(12.6%)를 얻는데 그쳐 재선도전에 실패했다.


사업에 성공한 김향수의원 정치적으로 빛 못봐 

   
김향수 의원이 1959년 국회 체육진흥위원장인 이철승 의원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우측이 김향수 의원)
 
4대 의원을 지낸 우곡(牛穀) 김향수 의원(1912.11.14)은 강진읍 송전리 신학마을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김 의원은 15세 때 상경, 견문을 넓혔고 17세 때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일본 니혼대학 법과 전문부를 수료한 김 의원은 귀국 후 회사를 설립, 자전거와 양품 · 잡화 등을 수입해 국내와 만주에 판매했다. 

그의 사업은 날로 번창해갔다. ‘아남반도체’로 명성을 떨치기 전까지는 자전거 부품을 생산하거나 자전거를 수입해 판매했고, 심지어 브러시용 돼지털까지도 외국에 수출해 반도체 산업의 밑거름이 될 수 있는 큰돈을 벌었다.

김향수 의원은 정치인이라기보다는 경제인으로 더 유명하다. 김 의원은 우리나라 반도체업계의 선구자이다. 지난 1968년 반도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기에 국내 기업으로는 최초로 반도체 사업에 착수, 오늘날 한국이 반도체 국가로 발전하는데 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1974년 당시 ‘전자산업의 꽃’이라 불리던 컬러 TV를 한국 최초로 생산하여 국내 전자산업의 신기원을 열기도 했다.

김 의원은 이병철 삼성 회장에게 “D램 산업은 삼성과 같은 대기업이 꼭 해야 하는 사업”이라고 권유, 오늘날의 삼성전자가 있도록 조언자역할을 했다. 정주영 현대 회장은 정부의 권유로 반도체 산업을 시작할 때 “반도체를 가르쳐 달라”며 김 의원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그가 일으킨 반도체 산업은 한국 전자산업과 기술 산업의 기폭제가 되어 한국경제 발달에 큰 자양분이 됐다.

‘경제인 김향수’는 한국 경제계의 거목이었지만, ‘정치인 김향수’는 공(功)보다는 과(過)가 많다. 4대 총선을 앞두고 서울에 까지 올라간 보통학교 은사를 비롯한 지역민들의 강력한 출마 권유로 “정치를 통해 나라에 봉사할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정계입문은 했지만, 2년2개월이라는 짧은 임기 때문인지 두드러진 활약은 없었다.

당초에는 자유당의 실정(失政)을 응징하겠다고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국회 진출 후에는 “여당속의 야당이 되겠다”는 논리를 내세워 자유당에 입당했다.

김 의원은 임기동안 본회의에서 발언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당시 한 신문은 김 의원의 ‘본회의 무 발언’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다.

참고로 당시에는 지금처럼 상임위 위주의 의정활동이 아니라, 본회의 중심의 의정활동이었다. 상임위 활동 중심으로 의정활동이 옮겨간 것은 1963년 11월 26일 선거로 출범한 6대 국회 때부터. 따라서 본회의 발언횟수로 어느 정도 의정활동을 평가할 수 있다.

김 의원은 유일한 의정활동 성과로 기록될 뻔했던 법안 제정이 4·19로 무산되기도 했다. 그는 ‘기계공업 육성을 위한 자전거 경기법안’을 성안, 상공위와 법사위까지 통과시켰으나, 4·19가 일어나고 국회 임기가 단축되는 바람에 법률 제정은 이뤄지지 못했다.

1960년 7월 29일 치러진 상원의원 격인 초대 참의원 선거에 자유당을 탈당, 무소속으로 도전했으나 중도에 후보를 사퇴했다. 김 의원은 4·19 성공이후 정국을 주도했던 학생들에 의해 반혁명세력으로 지목돼 다른 자유당 활동을 했던 전남지역 2명의 참의원후보와 함께 출마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김 의원은 전직 의원들의 모임에서는 활발하게 활동했다. 4대의원 친목회장을 지낸데 이어, 대한민국 헌정회 회장을 두 번이나 역임하기도 했다.

   
김향수 의원이 동료 의원들과 도자기 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왼쪽에서 세 번째 검정색 양복이 김향수 의원)
 
김 의원이 설립했던 아남산업과 아남반도체는 그의 장남(김주진)이 회장으로 있는 미국법인 ‘앰코테크놀로지’로 통합되었다. 한국에는 광주 등지에 공장이 있는 앰코테크놀로지 코리아(대표이사 김주호)가 김 의원의 ‘가업’을 잇고 있다.  

김 의원은 2003년 6월 2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그는 경기도 용인시에 소재한 가족묘지에 잠들어있다.  /임영상 객원기자(정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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