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육우입식은 소값 파동 피해로 이어졌다

전두환 정권시절 소고기 값 안정화를 위해 82년부터 외국소인 붉은색 바탕에 발목 등에 흰색의 털을 가진 헤어포드(헤리퍼드)와 흰색의 털을 가진 샤로레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최초에 들어온 소는 호주산으로 약 2,500두에 달했다.

강진에서도 육우가 82년도에 232두, 83년도에 279두, 84년도에 102두가 입식 되었다. 처음 입식 때인 82년도에는 입식을 희망하는 농민들이 많아 군 자체로 심사를 하여 분배해야할 정도로 인기였다.

많은 꿈을 갖고 입식하게 된 도입육우들은 처음부터 많은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심했던 것이 소 피부병이었다. 이 피부병은 인수 공통 전염병으로 사람에게도 옮을 수 있는 병이었다.

이 피부병은 목초지에서 방목하고 있던 소들이 배로 이동하면서 국내에 환경 적응이 되지 않아 들어올 때부터 걸리기 시작했다. 이 병은 농가에 입식되면서 좁은 공간에서 묶어 키우다 보니 피부병이 안걸릴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필자도 축산계 근무 당시 소 피부병 때문에 농가에 출장을 많이 나갔다. 농장을 방문해보면 도입육우 모두에 피부병이 걸려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시중에 파는 피부병 치료제를 사다 소에게 발라 보았지만 잘 낫지 않는다는 하소연을 많이 들었었다.

그 때 우리는 이 피부병이 약만 가지고는 치료에 한계점이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도입육우 모든 농가에 낮에는 무조건 밖에 내어 햇빛을 쬐어주어야 한다고 지도하곤 했었다.

소 사육기반을 확충코자 도입했던 육우로 인해 82년도에 큰 소 한 마리값이 150만원정도였던 것이 1984년도에 들어서면서 8~90만원으로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송아지 가격도 최하 15만원까지 떨어지는 소 가격 파동의 원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강진의 농가들도 피해가 컸다. 소값 폭락에 견디지 못한 농가들은 강진우시장에서 소에 ‘소값 보상’ ‘소값 똥값’이라고 소 등에 스프레이로 써서 소몰이 시위를 시도하다가 경찰과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 때 농민들에게 나왔던 우스갯소리가 ‘소 키는 놈, 돼지키는 사람, 개 키는 양반’이라는 속어가 유행할 정도로 소값 파동이 농민들의 가슴을 얼마나 멍들게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소값 파동이 장기화 되고 농업인들의 시위가 격화될려고 하자 정부에서는 보상책을 발표했는데 ‘소 입식자금 상환 연기, 이자 감면, 학자금 지원, 정부양곡 무상지원과 소 수매’등 이었다.

이와 함께 마을에 간이도축장을 설치하고 자가 도축을 허용하여 소 사육두수 줄이기를 하는 등 소값 회복에 노력을 기울이고 그동안 많은 지원이 있었던 소 입식자금도 지원을 중단했다.

이 시기 강진에서도 네 사람이 모여서 소 한 마리를 도축하여 나눠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렇게 암소 도축을 허용하다 보니 과다한 도축으로 한우 사육기반이 붕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이 후 소 값은 어느정도 회복되었으나 육류의 소비가 공급을 앞질러 수입 쇠고기의 양이 증가했으며 국제적으로 UR협상이라는 큰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전 세계적으로 자국의 농축산물 문제 해결을 위하여 힘쓰는 가운데 강대국들의 수입 개방 압력이 부각되면서 쇠고기에서도 수입육에 대비한 한우 고급육 생산에 눈을 돌리게 됐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입 개방 대응책으로 품질 고급화와 사양관리 시설의 자동화로 생산성 향상, 노동력 절감으로 농가 경쟁력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정부 정책이 바뀜에 따라 이 시기부터 입식 자금 대신에 축사 시설개선 자금과 축산 기자재 공급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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