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 흐르고 남쪽으로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들판이 끝나는 곳에 마을이 있다

400년 이상된 당산나무가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400년 이상된 당산나무가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큰 마을이다. 강과 들이 있으니 풍족한 마을이다. 남쪽으로 큰 산이 버티고 있으니 옛날 옛적 땔감도 풍족했을 것이다.

가을이 깊어지는 이때, 군동 덕천마을앞 들판이 샛 노랗다. 군동 덕천 마을은 풍수지리학적으로 마을의 형국이 사람의 귀의 모습과 닮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인근마을 주민들은 덕천마을을 귓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덕천이라는 마을이름은 18세기경에 마을을 가로지르는 큰 냇가인 구실이 탐진강의 옆에 위치해 덕을 갖추고 행복이 온다고 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덕천마을 주민들은 오래된 마을의 역사만큼이나 오랫동안 구전되어져 내려오는 옛 지명을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다.

덕천마을 모습이다.
덕천마을 모습이다.

 

뒷산에서 아홉골짜기 물이 마을앞으로 흘러들어 탐진강에 유입된다고 해 붙여진 구실, 산 형국이 미인처럼 아름답다고 해 붙여진 미인재, 보리농사가 잘 된다고 해서 붙여진 맥골, 마을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바람이 세게 분다고 해 붙여진 바람난골 등 20여개의 고전적인 고(古)지명이 주민들 사이에 사용되고 있다.

덕천마을의 큰 자랑거리는 예전부터 교육열의가 높다는 것이다. 덕천마을에서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사람이 10여명에 이른다. 교육환경이 좋아진 지금도 서울대학교 입학하기가 어려운데 교육환경이 열악했던 7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울대학교생을 많이 배출해낸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뿐만 아니라 덕천마을에서 배출된 공무원의 숫자도 100여명에 달할 정도로 교육열의는 관내에서 최고였다.

마을 가운데로 개천이 흐른다.
마을 가운데로 개천이 흐른다.

 

이처럼 덕천마을에서 인재들이 많이 나온 이유는 1940년대 쯤 인근의 화방마을과 더불어 군동면을 대표하는 서당이 덕천마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민들은 소개했다.
또 1945년 이후에는 당시 동각과 개인 사랑방등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4~5개의 야학동아리들이 활발하게 운영되었던 것이 인재양성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주민들은 설명했다.       /글·사진=주희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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