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현구시인을 알리기 위해 애썼죠”

젊은 시절에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님으로서 활동했고 중년에 접어들어서는 지역 소상공인을 위해 신협을 조직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 있다. 바로 임상호(90) 전 강진신협 이사장이 주인공이다.

그는 농민운동에도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임 전 강진신협 이사장은 강진읍 학명리 강진공단 인근에 거주하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사회활동과 함께 포도 농사를 짓기도 했고 최근까지도 단감 농사를 하는 농민으로서 삶을 살기도 했다.

 

20대 초반 성요셉여고 부임
국어교사로 활동하며 강진 정착
현구기념사업회 회장으로도 활동

가난한 주민위해 신협운동 주도
85년 강진신협 2대 이사장 취임
금융기관으로 성장 이끌어


임 전 이사장은 나이가 들면서 시력이 급속히 나빠지면서 사람의 얼굴을 식별하기 어려워지면서 농사를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됐다.

농장의 단감나무도 모두 뽑아버리고 정리하고 현재는 농사는 짓지 않고 자택에서 정원을 가꾸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거동이 쉽지는 않지만 강진읍교회 장로로서 종교활동은 계속 해나가고 있다.

임상호 전 강진신협 이사장은 1930년 완도군 신지면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에서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했다. 조선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학교 졸업후 우연한 기회에 강진의 성요셉여고로 교사로 부임하게 됐다. 이때가 그의 나이 24세정도 되던 시절이었다. 50년대 중반정도 무렵이다.

이때 가족들은 완도에서 살고 있었고 임 전 이사장 혼자 강진으로 부임해 교사생활을 했다. 그렇게 10년후 그는 가족들과 함께 강진으로 이사를 왔다. 그는 슬하에 2남5녀를 두었다.

임 전 이사장은 성요셉여고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인상적인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교사들의 월급인상 문제이다. 임 전 이사장이 교사로 근무하던 당시 성요셉여고 교사들의 한달 월급은 약 3천원정도 였다.

당시 강진중학교 교사들의 월급이 6천원이었으니 적은 월급을 받으며 일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임 전 이사장은 과감하게 교사들을 대표해 학교 운영을 맡고 있는 수녀들에게 교사들의 처우개선 문제를 요구해 월급인상을 이끌어냈다.

또 학교 운영 문제에서도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중 한 예로 교실 환경정리 문제가 있었다. 이때 학교에서는 수녀들의 방침에 따라 교실에 미국 역사와 관련된 건물이나 인물, 미국의 자연환경 그림 등을 붙여놓는 경우가 많았다.

임상호 전 신협 이사장이 1995년 현재 위치에 강진신협 신청사를 신축하고 임직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임 이사장은 앞줄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임상호 전 신협 이사장이 1995년 현재 위치에 강진신협 신청사를 신축하고 임직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임 이사장은 앞줄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이 모습을 본 임 전 이사장은 문제제기를 했다. 자신이 맡은 교실에는 금강산 사진이나 안중근과 같은 우리나라의 위인 등의 사진을 붙여놓았다.

임 전 이사장은 국어교사로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학교 교지를 창간했다. 함께 교지를 담당한 다른 교사들은 학교 운영을 맡고 있는 수녀들의 활동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배치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임 전 이사장은 한국적인 냄새가 나는 교지를 만든길 원했다. 학생들이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고 있는 사진처럼 수녀들보다는 한국적인 분위기가 나는 학생들과 활동모습을 담기도 했다.

이렇게 학교에서 약 15년간 근무하고 퇴직하고 농업에 뛰어들게 됐다. 현재 동원 공장이 있는 곳에 땅 1천평을 구입해 포도농사를 지었다.

70년대만 하더라도 포도는 귀한 과일이었다. 이때 강진에서 3곳 정도가 재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임 전 이사장은 이 시기에 농민운동을 접하게 된다.

강원형 목사가 운영하는 기독교계 사회운동기구인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농민의식개혁 운동 교육을 받은 마원훈 전 축협조합장의 권유를 받아 교육을 받게 됐다.

이 교육으로 임 전 이사장은 사회의식개혁 운동에 눈을 뜨게 됐고 이시기에 인연을 맺었던 장영근 선생에게도 이 교육을 추천했던 것이었다. 또 농사를 지으면서도 지역의 문화운동을 위해서도 힘썼다.

강진농고 출신이었던 정문석 등 조선대 국문학과 출신 후배들과 함께 지역내에서 시화전도 개최하는 등 문화융성을 위해 노력했다.

또 역사속에 묻혀있었던 현구 시인도 임 전 이사장 덕분에 세상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자신이 모아두었던 현구 시인의 시를 모아 현구시집을 처음으로 출판했다.

이 시집으로 인해 현구 시인이 영랑 못지 않은 훌륭한 시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됐고 오늘날 현구문학제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됐다. 임 전 이사장은 현구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 1980년대에 들어서는 은행에 가지 못하는 가난한 서민들을 위한 금융기관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신협운동이 시작됐다.

임 전 이사장은 당시 강진읍교회 김경심 목사와 김영진 국회의원 등과 함께 강진신협 창립을 주도했다. 초대 이사장은 김경심 목사가 맡았고 뒤를 이어 1985년부터 임상호 선생이 2대 이사장을 맡아 2006년 퇴임할때까지 25년간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강진신협은 30여명의 출자금 30만원으로 시작해 8천여명의 조합원과 자산만 2천억대로 지역 대표 금융기관으로 성장했다.

임 전 이사장은 현재 신협 이사장처럼 월급을 받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보수로 이사들과 함께 일정 금액을 출자하면서 신협 성장을 위해 일했다. 임 전 이사장이 월급을 받은 것은 퇴직 직전 마지막 4년간이 전부였다.

이렇듯 임 전 이사장은 지역의 어려운 소상공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자세로 25년을 근무해왔던 것이다.  


임상호 전 강진신협 이사장은?

•1930년 완도 신지면 출생
•1950년대 중반 성요셉여고 교사로 근무
•1970년 포도 농장 운영
•1985년 강진신협 2대 이사장 취임
•2006년 강진신협 이사장 퇴임


후배들에게 보내는 편지

“시와 책관련 문화행사 늘었으면”

나는 젊은 시절 강진의 대표적인 시인중 한명인 현구 시인의 업적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만큼 강진에서 문화 육성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내가 그렇게 문화 활동을 해왔던 것은 강진은 역사와 문화의 고장이라는 생각때문이었다.

오늘날 강진의 젊은 청년들을 바라보면서 문화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봉사단체와 경제적인 상인들의 모임들은 늘어나고 있지만 문화활동을 하는 젊은 청년들이 모인 단체는 많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강진은 함께 모여 앉아 시와 문화, 책을 논하고 음악도 듣고 이런 것들을 발표하고 미술 전시회도 개최하는 등 문화활동이 필요하다. 젊은 청년들이 문화에 관심을 갖고 활발한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강진은 다산과 영랑, 현구 선생의 흔적이 남아있는 문화의 고장이다. 문화의 고장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관심을 가져보는 후배들이 되어주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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