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배가 닿았던 곳 지금도 파면 갯벌나와
마을 주변산에 문중 제각만 5개나 ‘명당’

마을 동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부드러운 산맥이 이채롭다. 이 일대에 여러 문중의 사당이 있다. 멀리 임천저수지가 보이는데, 오래전에는 마을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마을이다.
마을 동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부드러운 산맥이 이채롭다. 이 일대에 여러 문중의 사당이 있다. 멀리 임천저수지가 보이는데, 오래전에는 마을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마을이다.

 

한때 군청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때 원님이 있었던 동헌을 의미한다. 마을에 공원터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 동원건물이 있었고, 동원샘터가 있었다. 시장이 있었던 시장터라는 곳도 있었다. 동원이 있는 치소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지명이 남아 있는 곳으로 봐서 중요한 관공서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동마을 전경이다.
장동마을 전경이다.

 

그렇게 보면 장동마을의 산세가 심상치 않다. 마을 뒷산을 중심으로 동과 남으로 산맥이 길다랗게 이어진다.

팔영마을과 차경마을을 아우르는 영파리로 총괄되는 이곳에 각 문중의 사당이 여섯곳이나 있다.

제주고씨 제각인 장춘사와 청주김씨 제각인 금강사, 해남윤씨 문중제각과 김해김씨 문중의 관암사, 언양김씨 제각은 두개가 있다. 명당을 찾아가는 문중의 제각이 이렇게 많은 곳이 없다.

멀리 마을앞에 임천저수지가 가로 막고 있지만 아주 오래전 장동마을과 팔영마을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뚜렷한 흔적이 많다.

마을 정자뒤로 들판이 시원하다.
마을 정자뒤로 들판이 시원하다.

 

마을앞에 있는 강두머리란 곳이 배가 닿았던 곳이다. 지금도 땅을 파면 갯벌이 나온다고 한다.

또 한가지 뚜렷한 증거는 팔영마을쪽에 있는 전방후원분이다. 6세기 초 만들어진 일본식 무덤이다. 영암등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모두 예전 바닷가에 만들어 졌다.

이런저런 것들을 종합해 볼 때 영파리 장동마을과 팔영마을 일대는 고대 해양문화가 결집됐던 곳이었다.

장동마을은 원래 도암면 영파리였다가 1973년 7월1일자로 강진읍으로 편입됐다. 1970년 3월에 영파초등학교가 건립된 후 1991년에 폐교됐다.

토란대 다듬는 할머니.
토란대 다듬는 할머니.

 

지금은 54가구 110여명이 산다. 장동마을에는 유서깊은 마을계가 이어져오고 있다. 100여년전 마을 사람들이 근본을 깨끗이 다스리자는 취지의 청원계(淸元契)를 만들어 그 명맥이 이어졌다.

이런 전통이 있기 때문일까. 지난해 말에는 출향인들이 SNS를 통해 서로 연락을 주고 받아 300여명의 출향인들이 고향마을에 모여 큰 잔치를 벌였다. 

장동마을 김한탁 이장은 “장동마을은 어려울 때 서로 돕고 헤쳐나가는 남다른 저력이 있는 마을이다”며 “마을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모든 마을의 공통 현상이지만 항상 젊고 건강한 마을을 만들기 위해 온 주민들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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