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3학년때 공채 시험 합격하며 공무원 생활 시작

나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대구면 저두리 중저마을에서 태어났다. 이때 중저마을은 약 40호 정도가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중저마을은 농업보다는 어업에 종사해서 먹고 살았다.

마을에 논이 드물었기 때문에 논농사는 거의 없었고 밭농사를 하거나 바다에 나가 어패류를 잡아 팔아 생계를 꾸려나갔다.

우리집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주로 마을앞 갯벌의 양식장에서 바지락과 굴을 채취하셨다. 이렇게 낮에 채취한 바지락과 굴은 밤새 까서 시장에서 내다팔았다. 주로 칠량장을 이용했고 많이 채취한 날은 강진읍시장과 장흥 대덕장까지 가서 팔기도 했다.

특히 바지락은 마을앞 양식장에서 채취했다. 칠량 봉황마을 인근의 죽도 부근에 진등이라는 곳이 있다. 물이 빠지면 길다란 등과 같은 모습이 나타난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곳이다.

60년대에는 그곳에 바지락 종패가 많았다. 6월부터 8월까지 죽도 부근 진등에서 바지락 종패를 캐다가 마을 인근의 개인 양식장에 뿌려서 키웠다.

이렇게 겨울까지 바지락을 키웠고 이를 채취해서 시장에 내다 팔았던 것이다. 이때만 하더라도 바지락은 강진만 갯벌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내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60년대에는 강진읍에서 대구면까지 비포장도로인 데다가 차도 없었기에 주로 걸어다녔다.

어머니는 밤새 굴과 바지락을 까시고 새벽 4시무렵이면 집을 나서 강진읍 시장으로 향했다. 당연히 차가 없었기 때문에 걸어다녔다. 걸어서 3~4시간정도 걸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머니가 주로 이용했던 칠량시장은 당시에만 하더라도 규모가 상당히 컸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황금체육관이 있는 곳 일대가 모두 시장이었다.

칠량장에는 대구면을 비롯한 주변 지역에서 이용했기에 상당히 규모가 컸던 시장이었다. 당시 칠량장에는 어물전이 있어 그곳에서 바지락을 팔았는데 인기가 좋아 금방 팔려나갔다.

나는 칠량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강진중학교에 입학했다. 중저마을에서 강진읍까지 통학을 할 수 없었기때문에 당시 군동 평리에 있던 외갓집에서 살면서 학교를 다니게 됐다. 중학교 졸업이후 1971년 강진농업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이때도 외갓집에서 통학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 현재 강진중학교 인근의 논이 모두 실습포였다. 그곳에서 농사를 짓는 방법을 배웠는데 이때에는 힘든 농사일과 공부에 흥미가 없어 재미있을 것 같은 밴드부에 가입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음악실에 모여 연습을 하곤 했는데 나는 처음에는 드럼을 쳤고 이후 바리톤과 트럼펫도 연주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음악이 필요한 행사에는 항상 밴드부가 함께 했다. 청자축제의 전신이었던 금릉문화제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지역 행사에 농고 밴드부가 나가 연주를 하곤 했다.

이때 학교에서 밴드부에 대한 지원이 거의 없어 밴드부 단체복도 자체적으로 돈을 모아 맞춰입을 정도였다. 이때 담당 선생님이 행사가 끝나고 나면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사줬는데 이 재미로 밴드부 생활을 즐겁게 했다.

그러던중 1973년 3학년 시절 인생을 바꿔놓은 일이 일어난다. 나에게 외숙 2분이 계셨다. 한 분은 농촌지도소에 근무하셨고 또 한분은 군청에 근무하셨다.

농촌지도소에 근무하던 외숙이 나에게 농촌지도소에서 시험을 통해 직원을 공개채용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외숙은 농촌지도직은 국가직이기 때문에 대우가 좋다며 나에게 시험에 도전해볼 것을 권유하셨다.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설마 합격할까라는 마음으로 전혀 기대를 하지 않고 시험에 응시했다. 1974년 1월 2일 합격자 발표가 났다. 현재 해남윤씨종친회 사무실 부근에 합격자 명단이 붙었다.

나는 당연히 불합격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합격자 명단을 보지 않았는데 친구가 명단을 보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합격한 것이었다. 이렇게 나는 농촌지도직으로 공직자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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