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거북이 죽으면서 이승만의 운도 끝났다’

1948년 3월 24일 큰 거북이 잡혔던 도암 송학리 앞바다의 모습이다. 거북이 잡혀 있던 죽방망이가 어디쯤 있었는지 기억하고 있는 주민은 없다. 거북을 구경하러 몰려왔던 사람들의 흔적도 없다. 한때 전국을 떠들썩 하게 했던 강진 거북은 죽은 박제가 되어 지금도 부산에서 전시중에 있다.
1948년 3월 24일 큰 거북이 잡혔던 도암 송학리 앞바다의 모습이다. 거북이 잡혀 있던 죽방망이가 어디쯤 있었는지 기억하고 있는 주민은 없다. 거북을 구경하러 몰려왔던 사람들의 흔적도 없다. 한때 전국을 떠들썩 하게 했던 강진 거북은 죽은 박제가 되어 지금도 부산에서 전시중에 있다.

 

강진에서 신령스런 거북이 잡혔다는 소식이 중앙일간지등에 대서특필되면서 도암 송학마을 바닷가로 하루에 수백명의 사람이 몰려들었다. 썰물이 되어 거북의 모습이 드러나면 사람들이 줄을 서 거북등을 만져 보았다. 거북등에 타보려고 옷을 벗고 죽방망이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또 막걸리를 주전자로 가져와 거북에게 억지로 먹이는 사람도 있었다.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도 회고록을 통해 초등학교때 도암에서 큰 거북이 잡혔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걸어서 구경을 갔고, 바로 그때 바다사업을 꿈꾸웠다는 말을 했다. 김 회장도 그때 그 현장에 있었던 것이다.

어류전문가가 볼 때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장을 지켜본 정문기 한국수산기술협회장이 이 대통령에게 다급히 보고서를 보냈다. “거북이가 벌써 막걸리 두어말은 마신 것 같습니다. 저렇게 방치하면 거북이 살아남지 못합니다. 다시 바다로 돌려 보내든지 무슨 수를 써야하지 않겠습니까.”

  거북의 등에 올라탄 사람들

강진 거북의 죽음을 끝까지 슬퍼하고 아쉬워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
강진 거북의 죽음을 끝까지 슬퍼하고 아쉬워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

화들짝 놀란 이승만 박사가 즉각 경무대경찰서장을 불렀다. 이 대통령은 거북이 주변에 보초를 서고 주민들이 일체 주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이때부터 죽방망이 속의 거북은 24시간 경찰의 보호를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거북을 서울 창경원으로 데려가 키울 작정이었다. 서울 창경원에는 거북이 올라올 것을 기정 사실화하고 거북이 집까지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당대 최고 권위의 어류학자인 정문기박사는 따뜻한 바닷물에서 생활하는 거북을 서울에서 키울 경우 십중팔구 얼어 죽을 것이라고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래서 거북은 결국 부산수산시험장으로 가게 된다. 정 회장은 이 거북을 서구(瑞龜)라 이름 지었다. 상서로운 거북이라는 뜻이다.

서울에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거북을 보고싶어 안절부절이었다. 정문기 회장이 거북을 부산으로 보내고 강진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동안 이 대통령은 거북을 보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부산으로 옮겨간 강진의 거북은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강진 거북의 인생은 험난의 연속이었다. 강진에서 막걸리를 너무 많이 마시고 갔기 때문이었을까.

거북의 안식처는 부산영도에 있는 중앙수산시험장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던 수산시험장이었다. 거북을 키우는 것도 당시 처음있는 일이었다. 강진거북은 이곳에서 미리 마련한 길이 6m, 폭 3m의 ‘물통’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거북을 보려고 이승만 대통령이 수산시험장을 다녀간데 이어 부산시민들이 곧바로 몰려 들었다. 거북을 구경하기 위해 매일같이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거북의 인기는 치솟았으나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겨났다.

거북은 매일 엄청난 양의 조개류를 먹어댔다. 특히 껍질벗긴 새조개와 새고막을 즐겨 먹었다. 하루 먹는 양이 6~12㎏에 달했다. 이를 구입하는 돈이 하루에 5천원에 달했다.

2012년 7월부터 부산에 있는 국립수산과학원에서 공개 전시중인 강진거북. 안내 간판에 ‘이승만 대통령이 사랑한 거북이’란 글귀가 쓰여 있다. 이 전대통령은 강진거북이 죽자 이를 박제로 만들어 경무대에 놓아두기도 했다.
2012년 7월부터 부산에 있는 국립수산과학원에서 공개 전시중인 강진거북. 안내 간판에 ‘이승만 대통령이 사랑한 거북이’란 글귀가 쓰여 있다. 이 전대통령은 강진거북이 죽자 이를 박제로 만들어 경무대에 놓아두기도 했다.


부산으로 가다

당시에는 쌀 한가마가 5천원 정도 할 때였다. 지금 쌀 한가마가 15만원 정도 하니까 당시 화폐가치로 거북이 한 마리가 먹어대는 사료치고는 대단한 비용이었다. 매일같이 들어가는 사료값에 입이 떡 벌어진 중앙수산시험소는 정부에 거북이 사료값으로 900만원을 긴급 지원 요청하기도 했다. 지금 돈으로 따지면 2억7천만원 정도를 요청했으니까 대단한 거북이 아닐 수 없었다.

1950년 3월 초 거북을 구경하려고 내려온 백성욱 내무부장관이 “비좁은 통속에서 자유를 구속당한 거북이 매일 오천원의 국고금을 먹고 있네”라고 웃었다는 일화는 당시 부산사람들의 술자리에서 자주 회자됐던 말이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서울이 순식간에 함락됐다. 이승만 정부가 부산으로 부랴부랴 이전해 내려왔다. 낙동강에서 전열이 정비되면서 부산은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도 무사하게 서울로 올라갔다.

이를 두고 항간에는 ‘6.25사변중 부산이 교두보로 함락되지 않고 이 대통령이 안전하게 서울로 돌아간 것은 거북 덕택이다’는 말이 퍼졌다.

강진거북은 이승만 대통령의 운명과 관련이 깊어지면서 전쟁을 기점으로 그 인기가 더 올라갔다. 아직까지 거북을 ‘알현’하지 못한 정부인사들과 고위공무원들이 전쟁통에도 부산수산시험장에 줄을 설 정도였다.

강진거북이 부산에서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날, 1956년 7월초의 일이다. 중앙수산시험장의 수의사가 거북의 몸둥이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목과 다리에 혹이 생기기 시작 한 것. 거북은 조금씩 음식을 멀리하더니 결국 하루 12㎏까지 먹어 치우던 조개도 마다하고 식음을 전폐하기 시작했다. 중앙수산시험장이 난리가 났다.

‘이승만 대통령과 운명을 함께 하고 있는 거북’이 혹시 잘못될 경우 그에 대한 책임추궁은 물론 전국에서 쏟아질 비난을 감수할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강진거북의 건강상태는 즉각 해무청에 보고됐고, 그 아찔한 소식은 경무대에 긴급상황으로 올라갔다. 강진거북이 몸에 혹이 돋아나고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는 소식에 가장 놀란 사람은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다급했다. 당시 정치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그해 5월 15일 치러진 3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가 투표 며칠 전에 사망하여 유권자 56%의 지지를 얻어 세 번째 당선됐으나 그의 정치적 기반은 갈수록 취약해 지고 있었다. 이때 자신의 운명과 함께하고 있다고 소문난 거북이 죽는다는 것은 이 대통령에게 상상할 수 없는 악재였다.

이 대통령은 즉각 “외국 수의사로 하여금 수술케 하라”고 지시했다.<동아일보 1956년 8월 1일자> 7월 23일 서전병원 병원장과 외과의사, 미국인 수의사 4명이 중앙수산시험장으로 급파됐다. 서전병원은 6.25이후 유엔군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해 부산 서면에 들어섰던 주한적십자병원이었다. 당시로서는 최고 의료진이 있는 곳이었다.

강진거북의 상태는 비관적이었다. 1956년 7월 30일 서전병원외과과장과 미8군소속 군의관 크린트대위가 진찰을 한 결과 병명을 알 수 없다는 소견이 나왔고, 거북의 전체적인 건강상태 또한 회복되지 못할 정도로 중태라는 최종 진단결과가 나왔다.

온 국민들의 사랑 독차지

당시 <동아일보>는 의료진들이 병든 거북을 어떻게 치료할지 이 대통령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고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 서전병원측은 거북수술도중 거북이 죽을 경우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이 대통령의 최종 지시를 기다렸다고 한다.

의료진은 모두 미국인이였고 상대는 대통령의 총애를 받고 있는 거북이였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어떻게 해서든 강진거북을 살리려고 시도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강진의 거북은 8월 1일 끝내 숨지고 만다. 몸에서 작은 혹이 발견되고 식음을 전폐한지 한달만의 일이었다.

정문기 당시 한국수산기술협회장은 <동아일보 1966년 6월 18일>에 기고한 글에서 “이 대통령이 거북이 죽었다는 소식에 얼마나 상심하셨는지 며칠 동안 말씀이 없으셨다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이 대통령은 거북이 죽은 후 4년뒤인 1960년 4.19혁명으로 하야하고, 하와이 망명길에 오른다. 당시 호사가들은 ‘거북이 죽은 후 이 대통령의 운도 끝나갔다’는 말을 했다.

<경향신문> 1956년 8월 7일자 1면 ‘여적’이란 란에 실려 있는 글이 눈에 띈다. 경향신문은 8년전 강진에서 잡힌 거북의 죽음을 알리며 다음과 같이 질책하고 있다.

‘신령스런 거북이 주역의 근원이 되었고, 기린이 나타나면 성인이 나고 여우가 울면 동네가 망한다고 한다. 까치가 짖으면 길사가 있고 까마귀가 짖으면 흉사가 있다고들 한다. 이와같이 동물에게 인사(人事)를 상징시키는 것은 한낱 미신에 불과한 것이다.

이에 너무 집착하면 딱한 때가 많은데 강진거북 일이 꼭 그러하다. 거북이 잡힐때만 해도 굉장한 경사라고 떠들어 댔으니 이번에 거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결코 유쾌한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매사에 있어서 훼예포폄(毁譽褒貶. 칭찬하고 비방하는 말과 행동)이 지나쳐서는 안된다’

병으로 끝내 사망, 추억 남겨

2012년 7월 7일, 부산 기장군 기장읍 국립수산과학원 내 수산과학관에서 한 마리의 바다거북 박제 표본이 일반에 공개됐다. 그때 그 강진거북이였다. 강진거북은 죽은 후 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곧바로 박제로 만들어졌다.

이 대통령은 박제를 경무대로 옮겨 곁에 두고 봤다. 이 대통령이 강진거북에 얼마나 많은 애착이 있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거북박제는 이 대통령 재임중 다시 부산수산시험장(현 국립수산과학원)으로 보내져 일반에 공개하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다.

강진거북 박제는 2011년에야 국립수산원에서 일반에 공개됐다. 지금의 모습은 죽을 당시의 모습이라고 한다. 점잖지만 당당한 자태, 근엄한 눈매가 당시 전국을 주름잡았던 강진거북의 위풍을 짐작케 한다.

말못하는 거북은 강진 도암의 죽방망이에 잡혀 부산의 물통에서 죽기까지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운명에 대해 무어라 말하고 있을까. 60년을 뛰어넘는 역사의 조각들이 우리를 잠시 추억에 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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