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키워서 소비하고 수출도 하면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인데…

‘죽세공ㆍ죽림조성’연구교사 박동오

박동오 선생
박동오 선생

범촌 박동오 翁(凡村 朴東五, 1932-)은 서울대 농과대학을 1958년(54학번)에 졸업했다. 그 때는 자유당 말기였다. 정국은 혼란하고 민생은 핍절한 시절이었다. 당시는 갈만한 직장도 흔치 않았다.

박동오는 농학도로서 황폐한 농촌과 민족농업의 발전을 위해 일하기를 원했다. 농대에서 배운 농업이론과 실기를 농고 학생들에게 가르쳐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 있었다. 졸업 후 1959년 담양농고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이후 40여년간 농고교사, 교감, 교장, 전라남도 시군 중고등교사, 교장, 교육장으로 올인(all-in)했다. 올인이란 특정한 대상이나 일 따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이나 시간 그리고 가진 전부를 쏟아 붓는다는 영어식 표현이다.

범촌은 일선교사, 교감, 교장, 교육장으로 다음과 같은 교육역정을 마친 것이다. 담양농고교사(1959년)부터 시작하여, 강진농고교사(1964년), 호남원예고교사(1966년) 구례농고교감(1968년), 영암고교감(1971년), 신안군교육장(1975년), 고금중고교장(1979년), 나주공산중교장(1984년), 광양농고교장(1985년), 광양군교육장(1986년), 해남산이중교장(1989년), 강진성전고교장(1993년), 목포여고교장(1994-98년), 담양고교장(1999년)을 지낸 후 정년했다.

박동오는 농고교사 10년차 되던 해인 1968년『죽세공ㆍ죽림조성』(竹細工ㆍ竹林造成) 이란 책을 출간했다. 출판사는 부민문화사(富民文化社), 농가부업문고 식량증산문고 30호, 감수(監修) U.S.O.M.(주한미경제협조처) 농업교육고문 백대현(白大鉉), 저자 호남원예고등학교 박동오(朴東五)였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참대는 우리나라 중부에서 좀 더 남으로 치우쳐 자라고 있다. 그 용도가 광범위하여 수요의 십분지일 밖에 공급할 수 없는 실정이다. 나머지는 수입대에 의지하고 있어 경제발전에 마이너스를 가져오고 있다. 만약 국내에서 생산된 것으로 수요에 충족하고 더 많이 외국에 수출한다면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이 책의 목차를 개관하면 이러하다.

제 1장 향토죽림(鄕土竹林)의 개관(槪觀)
제 2장 대에 관한 기초지식
  1). 왕대속 2). 신우대속 3). 대의 염색체수 4). 자죽(雌竹)과 옹죽 5). 대 재배환경 6). 지하경(地下莖, 땅속줄기) 7). 지하경의 신장 8). 죽순이 나는 방법
제 3장 대(竹)의 재배와 원리
1. 국내 실정과 대의 재배 : 1). 적지 2). 위치 3). 기상 4). 지형 5). 토양 6). 식부의 시기 및 주수
2. 죽묘(竹苗) : 1). 파종법(播種法) 2). 삽죽법(揷竹法) 3). 지하경 죽묘 만드는 법 4). 모주법(母株法)
3. 죽림육성 : 1). 이용면 2). 경제의 수익성 3). 토지의 이용법
4. 시비(施肥)  5. 죽림과 잡초와의 관계  6. 병충해의 관리  7. 죽림여한(竹林餘恨)
제 4장. 죽림(竹林)과 가공(加工)
 1. 죽림과 보존  2. 죽재(竹材)의 접착(接着) 3. 죽세공(竹細工)
 참고문헌은 주로 일본 농학자 水原與藏의 저서『도해목죽공제작급가공법』을 비롯한 수권의 일본전문서적을 인용했다. 국내에서도 담양군의 죽림조성과 죽세공을 표본으로 삼고 연구했다.

박동오 교사는 이렇게 농촌부업으로서 효용에 관한 당위성을 호소한다. “대(竹)는 쌀이나 보리, 콩과 같이 한번 수확하기 시작하면 씨를 뿌리지 않고 매년 수확한다. 고로 우리는 박토에 다른 작물보다 이 대(竹)를 밭으로 일구지 못할 산록에서 생산해서 소득을 올리자는 것이다”.

박동오는 선험연구 자료만 인용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대를 직접 심어보고, 약품처리해 보고, 표본조사도 해보는 등 각고의 실험 결과를 이 책에다 반영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 나오는 죽묘관련, 죽재공품 제작에 관한 삽화(揷花, 컷)는 아마 일본서적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범촌은 만주 남산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니면서 일본어를 배웠다.

이후 그 일어실력으로 농업전문서적까지 번역해서 책을 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선험연구자료로서 한국인의 저서가 참고되지 않았다. 아마 참대연구에 관한 책자를 낸 것이 한국에서는 농고교사 박동오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필자는 유추(類推)해 본다.

박동오가 목포중 2학년에 재학중이던 1949년 연극반 사진이다. 당시 극작가 차범석 선생이 목포중에 부임해와“나폴레옹과 이발사”라는 연극을 연출해 무대에 올렸다. 박동오는 연극반 활동을 했다. 학교에서 공연후 기념촬영을 했는데 앞에서 셋째줄 분장한 학생 중 우측에서 다섯번째가 범촌 박동오 선생이다. 그 때 같이 했던 학생 중 최영철(국회부의장), 김상배(한일의원연맹간사), 모태관, 김종호 등이 있었다.
박동오가 목포중 2학년에 재학중이던 1949년 연극반 사진이다. 당시 극작가 차범석 선생이 목포중에 부임해와“나폴레옹과 이발사”라는 연극을 연출해 무대에 올렸다. 박동오는 연극반 활동을 했다. 학교에서 공연후 기념촬영을 했는데 앞에서 셋째줄 분장한 학생 중 우측에서 다섯번째가 범촌 박동오 선생이다. 그 때 같이 했던 학생 중 최영철(국회부의장), 김상배(한일의원연맹간사), 모태관, 김종호 등이 있었다.

 

응용생물학을 전공한 박동오는 육종학(育種學)에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저서에서 대(竹)의 “염색체수”까지도 연구했던 흔적이 보인다. ‘염색체’(染色體, chromosome)란 세포의 핵 속에서 관찰되는 유전 정보를 갖고 있는 물질을 가리킨다.

염색체에 대한 직접적인 외국문헌에 의하면 왕대속의 대부분 대는 48개이고 기타 72개의 염색체를 가진 것도 있다고 한다. 대(竹)는 육종상 다른 작물과 달라서 지하경(地下莖, 땅속줄기)에서 새로나온 신장부분이나 눈(芽)에다 방사선을 처리하여 지하경이나 눈의 염색체에 변동을 주어가지고 우수한 새로운 품종을 만들 수도 있지 않는가 생각한다.

강진에서도 50여년 전에 산자락을 낀 마을 집 뒤안에는 꼭 대밭이 있었다. 큰 대밭은 농가마을에서 부(富)의 상징이었다. 대는 농가에서 쓰이지 않는 곳이 없을만큼 필수품이었다. 대바구니, 대빗자루, 대소쿠리, 대울타리, 대석작, 죽석장판, 대젓가락 등 등이 떠오른다.

지금은 플라스틱에 밀려서 찾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친환경적 소재로 만든 죽세공품을 찾을 시기가 다시 돌아올 것으로 기대한다. 전라남도 담양군에 죽세공예를 진흥시키기 위해 1998년 3월죽물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이 박물관은 담양의 죽세 문화를 보존하고, 죽제품을 전시ㆍ시연ㆍ판매하고 있다.

2003년 한국대나무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여기에는 대나무 생태, 대나무의 생장특징, 대나무 재배와 죽세공예에 관한 전시가 되어 있다. 대나무를 활용한 죽세생활공예품, 약재와 건강식이 전시되어 있다.

육종학의 선구자 우장춘에게 배우다
 
범촌은 서울대 재학시절 육종학의 선구자 우장춘(禹長春, 1898~1959년) 박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우장춘은 일본에서 육종학 연구를 시작하여 해방 후 채소와 볍씨의 품종개량에 힘썼던 식물학자요 육종학자였다.

우장춘은 서울대 교수는 아니었고, 농촌진흥원 책임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농생물학도인 박동오는 친구들과 함께 때때로 찾아뵙고 강의도 들었다. 육종학에 관한 궁금증에 관해 질문을 하고 답변을 받았다.

우장춘은 특히 페튜니아(petunia) 홑잎꽃을 교배 약품처리 과정을 거쳐 더 예쁜 겹잎 페튜니아 꽃을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한국으로 영구 귀화한 후에는 수박의 씨나 어린 싹에 2N+2N=4N, 4N-N=3N을 만들기 위해 주야불철 노력했다. 결국 콜리친이라는 약품을 개발하여 활용한 끝에 “씨없는 수박”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3배체의 수박, 즉 씨는 없어도 수박이 보통 수박과 같이 성장할 수 있는 품종을 발견한 것이다. 우장춘박사는 과학자로 그 명성이 세계적으로 드높았다. 그보다 위대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경할 점에 있었다.

우박사의 선친 우범선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후, 일본으로 망명했던 반민족적인 인사였다. 우장춘은 일본에서 우범선과 일본여성 사이에 태어났다. 우장춘은 성장과정에서 아버지가 민족을 배반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조국에 사죄하기 위해 일본이 제공하는 좋은 조건을 뿌리쳤다. 결국 한국에 귀화하여 한국 육종학계를 개척했던 것이다.(범촌선생 증언)

박준옥(朴準玉)의 좌우대립을 넘은 우정
 
박동오는 저서의 머리말 말미에서 서울대 농과대학 강수원(姜壽遠) 지도교수에게 감사했다. 이어서 “이국에서 돌아오시지 못하고 지금 생존여부조차 알지 못하는 부모님과 14세 소년인 어린 본인을 데리고 다니시며 길러주신 박준옥 사형(朴準玉舍兄)께 고마움에 겨운 마음으로 이 책을 바칩니다”

‘舍兄’은 남에게 자기 형을 가리키는 말이다. 박준옥(1923-2019년)은 1946년 박동오를 만주에서 데리고 나온 친형이다. 박준옥은 6. 25 전쟁 전에 목포에서 시장상인들을 주력으로 120명을 모아 유달부대를 편성했다.

김홍일부대, 3ㆍ1부대의 중대장이었다. 정식경찰은 아니고 의경으로 출발한 것이다. 이 부대를 이끌고 여순사건을 진압하기 위한 작전에 동원되어 경찰측에 큰 공을 세웠다.

박준옥은 6ㆍ25 당시 신안군 지도면 처가에 피신해 있었다. 박준옥은 빨치산 잡는 의경활동을 했기 때문에 인민군에게는 반동이었다.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어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당시 목포정치보위부장은 권낙원이었다.

박동오는 형 박준옥을 살리기 위해 목포 양동 권낙원 자택을 세 번이나 찾아갔다. 형 박준옥과 권낙원은 목포공설시장 시절 절친한 사이였다. 박동오는 형의 구명운동을 했던 것이다.

6. 25 전에 권낙원은 보도연맹에 속해 있었다. 전쟁 직전 이승만 정부에서 보도연맹원을 친공산당 세력으로 간주하여 재판도 없이 죽이던 때였다. 박준옥은 권낙원이 특별한 범죄사실도 없고 친한 사이라 권낙원을 풀어내 도망치게 한 일이 있었다. 이 때 박준옥의 도움으로 살아난 권낙원은 인민군 세상이 되자 목포시 정치보위부장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즉 공산당 경찰서장이 된 것이다.

형은 꼼짝없이 죽게 생겼다. 사형집행은 목포사범학교 뒷산(애기산?) 골짜기에서 한다고 했다. 목포정치보위부에서 사형장으로 데리고 갈 때 우익반동들을 츄럭(트럭)에 실었다.

박준옥이 츄럭에 걸쳐놓은 판대기에 올라갈 때 권낙원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박준옥 이 새끼는 악질반동이다. 고문을 더 해야 해!”하면서 발로 차서 떨어뜨린 후 츄럭이 출발했다.

이후 권낙원은 형을 가만이 빼돌려서 살려 주었다. 좌우이념의 갈등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지던 시절에도 우정은 있었다. 보은(報恩)의 정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영암 국사봉(해발 614m)은 영암에서 월출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영암 금정면과 장흥 유치면이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여기 인근에 강진 옴천면이 있다.

박준옥은 영암 국사봉을 중심으로 빨치산 토벌에 앞장섰다. 박동오는 옴천태생이었다. 수많은 주민들이 유치로 영암 금정 국사봉으로 입산하는 것을 보았다. 월출산은 홑산이어서 유격전에 적합지 않았다.

금정면은 국사봉을 통해 장흥 유치와 강진 옴천과 연접된 오지였다. 당시 금정면에는 국사봉을 중심으로 5개군의 빨치산들이 집결해 유격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1950년 말경 당시에 좌익들은 산에 들어가면서 마을주민들을 데리고 갔다. 사상과 조직과는 관계도 없이 경찰이 진주한다고 하니 남아있기가 불안해서 피난을 따라갔던 것이다.

군경토벌 작전시에 아무 것도 모르는 양민들이 붙잡혀서 수없이 즉결처분을 당했다. 박준옥은 이 당시 경찰전투요원으로서 국사봉을 근간으로 빨치산 토벌전에 참여했던 것이다.

박준옥은 의경에서 순경이 되고, 수사형사를 오래하다가 결국 경사로 경찰계를 정년했다. 범촌의 가문에는 한맺힌 민족사의 상혼(傷魂)이 깊히 배여있는 것이다. 해방 후 75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동안 지속되온 좌우의 대립과 남북의 갈등은 이제 그쳐야 한다.

민족자주ㆍ화해공존 정신으로 한반도에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나아가야 할 것이다.(계속)      /김병균(자유기고가, 출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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