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기환 회장의 열정으로 옛 모습 되찾았다

석가세존사리 32과(顆)가 모셔져 있는 금곡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632~647) 밀봉(密奉)스님이 창건 성문사(城門寺)라 했다고 전해내려 오고 있다. 조선 성종 때 간행된 동국여지승람 불우(佛宇)조에 보은산 금곡사(金谷寺)로 나온 것을 보면 어느 시기에 명칭이 바꾸어지는지 알 수 없다.

금곡사 경내에는 고려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829호로 지정된 금곡사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오층이었으나 삼층만 남아 부분적으로 파손되어 원형을 잃었다. 1988년 6월10일 해체복원 과정에서 세존사리 32과(顆)가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금곡사 중창불사는 영흥도정공장 대표를 지낸 故 박기환 회장에 의해 이루어졌다. 박회장은 전남곡물협회 회장을 거쳐 정부양곡 도정업의 대표인 대한곡물협회 회장을 지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금곡사 대웅전 자리에 예전 조그마한 법당만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에 박회장은 금곡사를 중창을 위해 국내 사찰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자문을 구했다. 1992년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법당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불사(佛事)를 시작했다.

기존의 초라한 법당을 철거하고 팔작지붕의 법당건립 사업이 시작되자 강진군의회 의원으로부터 문화재보호법을 위반했다며 공사를 중지해야한다는 목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문화재보호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문화관광계장이었는데 법규에 위반한 사항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유권해석의 차이로 위법한 행위라며 몇 개월에 걸쳐 강한 압력을 행사했다.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관계관이 현장 방문 점검결과 위법사항이 없다는 의견을 제시해 사찰 중창사업은 다시 추진됐다.

중창 불사는 박 회장이 전액 사비를 들여 추진됐다. 박회장은 법당과 천불전 공사가 완료될 때까지 매일 현장에 출근하면서 당대 최고의 법당을 건립해야 한다며 몸을 사리지 않고 사업을 추진했다.

대웅전은 경복궁 복원사업에 참여한 진흥수 대목장이 맡았다. 특히 건물 전면에 배치된 두 마리의 용머리 조각은 현장에서 이뤄졌다. 대웅전(大雄殿) 현판은 두 마리 용머리 사이 다포(多包)에 걸려 법당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현대 서예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대웅전 현판글씨는 삼형제 서예가로 꼽히고 있는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이 쓴 글이다.  또 범종각에 설치된 종은 어머니를 기리는 마음으로 사모봉덕종(思慕奉德鐘)이라 이름하고 제작 시주했다.

이처럼 중창불사를 위해 사업비 3억원(현재 환가액 19억여원)을 쾌척하고, 입구에 김삿갓 시비와 국태민안일붕기원비 등 불사에 전력투구했다. 그 배경에는 방랑 시인 김삿갓의 시구를 읽고 난 뒤 신심이 두터워져 불사를 시작하게 됐다. 그런 까닭으로 금곡사 입구에 김삿갓 시비를 세웠노라고 나에게 귀띔해주었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김삿갓 시가 어떠했기에 신심이 우러나올 수 있었을까. 김삿갓이 강진을 방문하는 길에 금곡사를 찾게 됐다. 입구에 당도하자 개울물을 사이에 두고 삼십척이 넘는 어마어마하고 거대한 두 개의 바위가 하늘로 치솟아 있다.  마치 두 마리의 닭이 금방 싸우기라도 하는 형국(爭鷄岩)을 보고 화해하는 시한수를 지었다.

나는 중창불사 현장에 수회에 걸쳐 방문하면서 박회장의 열정에 감동을 받았다. 특히 박회장 살아생전 자비 10여 억원을 들여 아미타불 48대원을 상징하는 48척(16m)높이의 미륵부처님상을 원석(原石)으로 조성 봉안하고자 했다. 추진 도중 돌연히 찾아온 병마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후대의 몫으로 남겨 놓을 수밖에 없었다.

금곡사는 두 마리의 닭이 싸우는 형국이어서인지 닭요리 음식점들이 들어섰다. 90년대까지 사람들로 북적였으나 발길이 끊겼다. 다행히 금곡 벚꽃길 행사로 다시 관광지가 됐다. 때에 맞춰 2019올해의 관광도시의 일환으로 입구를 정비함에 따라 고즈넉한 산사를 찾을 수 있게 돼 다행스런 마음 그지없다.<끝>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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