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 스승으로부터 민족자주, 정의를 배웠다

일본의 도쿄 우에노공원에 있는 왕인박사비를 찾은 생전의 김향수 회장. 김 회장은 일제강점기 강진보통학교(중앙초등 전신) 5학년때 스승이었던 닷다스승이 자신의 손을 잡고 백련사나 무위사등을 돌며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설명해준 것을 평생 잊지 못하고 한일관계사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일본의 도쿄 우에노공원에 있는 왕인박사비를 찾은 생전의 김향수 회장. 김 회장은 일제강점기 강진보통학교(중앙초등 전신) 5학년때 스승이었던 닷다스승이 자신의 손을 잡고 백련사나 무위사등을 돌며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설명해준 것을 평생 잊지 못하고 한일관계사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미국의 수녀님들 이야기를 했으니 일제강점기에 강진에서 선생님을 했던 한 일본인 선생님 이야기를 하며 스승의 날 의미를 담은 인문기행을 마무리하겠다.

작고한 김향수 아남그룹 회장 스승에 관한 이야기다. 김향수회장은 1912년 강진읍 송전리 송정마을에서 태어나 강진보통학교(중앙초등학교 전신)를 졸업하고 15세에 혈혈 단신으로 서울로 올라가 학업을 계속했다.

이후 아남반도체를 설립해 훗날 삼성과 현대가 반도체 사업에 뛰어드는 초석을 닦았고, 오늘날 우리나라가 반도체 대국이 될 수 있는 첫 단추를 끼운 사람이다.  

우리나라 반도체산업 첫 단추

                    고 김향수 아남그룹 회장
고 김향수 아남그룹 회장

그의 삶속에는 고향 강진이 깊게 베어 있는 것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몇 편의 회고록속에서도 그렇고, 그룹 회장시절 여러 언론사와 인터뷰에서도 그는 고향 강진이 자신의 큰 중심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사업을 열심히 한 이유가 ‘부모님을 안심시키고 효행의 길을 닦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고, ‘사업을 할 수 있는 신의와 집념, 검약과 인내를 고향에서 배웠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김향수 회장의 이같은 고향에 대한 정은 한 사람의 스승과 깊은 관련이 있다. 김향수 회장은 보통학교 5학년 시절에 닷다 기요또(立田淸人)이라는 평생 잊지 못할 스승을 만난다. 일제강점기때다.

김향수 회장은 훗날 자서전에 ‘나의 인생에 있어서 신의와 집념, 검약과 인내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덕목이라는 교훈을 고향에 계신 부모님으로부터 배웠고, 민족자주, 정의, 지성일관의 사상의 싹을 심어 준 분은 닷다 스승이었다’고 회고했다. 부모님 다음으로 초등학교 5학년때 만난 담임선생님을 평생 은인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닷다 스승은 40세가 조금 넘은 일본인이었는데 강진에서 교사생활을 할 때 독신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살던 모든 일본인의 집에는 천조대신이라는 일본의 시조 대신의 그림을 걸어 놓았는데, 닷다 스승은 인도독립의 국민적 영웅 마하트마 간디의 사진을 걸어 놓고 있었다. 닷다 스승은 소년 김향수에게 간디의 책을 정독하도록 권했다.

또 어린 김향수의 손을 잡고 다산초당과 청자도요지, 백련사등을 돌며 유적지를 구경시켜 주었다. 당시만 해도 문화재라는게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할 때여서 강진사람들도 강진에 어떤 문화재가 있는지, 어떤 가치가 있는지 모르고 있었지만 닷다 스승은 강진의 문화재 가치를 누구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는 사람이였다.

김향수는 보통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해 도지사상을 받았다. 그러나 가정사정상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매일같이 닷다 선생의 하숙집으로 찾아가 책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닷다 선생이 조용히 김향수를 불렀다. 경성으로 가서 경성사범학교에 응시해 보라는 것이었다. 합격만 하면 학교측의 학비 보조가 있으니 학업을 계속하라는 것이었다.

1970년대 중반 온통 초가집이 가득하고 청자가마가 있었던 곳은 허허벌판만 있던 시절, 김회장이 부인 오승례 여사와 함께 청자도요지를 찾았다. 그는 스승 닷다의 영향으로 강진문화재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우치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 온통 초가집이 가득하고 청자가마가 있었던 곳은 허허벌판만 있던 시절, 김회장이 부인 오승례 여사와 함께 청자도요지를 찾았다. 그는 스승 닷다의 영향으로 강진문화재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우치고 있었다.

 

그 말은 학업에 목말라 하던 소년 김향수에게 소낙비 같은 말이었다. 배움의 길을 찾지 못해 답답하고 초조하던 가슴이 활짝 희망의 꿈으로 피어났다.

1926년 이른 봄, 김향수는 혈혈단신으로 고향집을 떠나 경성으로 향했다. 열다섯살 때였다. 닷다 선생은 제자 김향수에게 학생복 한 벌과 서울까지의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서울가는 기차를 타기위해 광주까지 걸어서 갔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김향수는 날개를 달게 된다. 2년 후인 17세때 일본유학을 가게 되고 이후 28세때 일만무역공사를 설립해 본격적인 사업의 길로 뛰어 들었다.

1945년(34세)에는 아남산업공사를 설립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컬러TV를 생산한데 이어 1958년(47세)에는 4대 강진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의 길로 들어서는등 2003년 6월 91세의 나이로 별세하기까지 우리나라의 기업사에 한 획을 그은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초등 5학년때 스승 닷다와의 만남

김향수 회장에게는 항상 고향과 부모님이 있었고, 그 다음에 항상 닷다 스승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삶을 굳건히 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26년 열 여섯 살 때 김향수가 고향을 떠난 것으로 마무리 되지 않았다.

닷다 선생은 강진보통학교에서 경기도 개풍초등학교로 근무지를 옮겼다. 그때도 독신이었다. 사업을 하면서도 스승과 계속 연락을 주고 받았던 김향수가 혼인을 적극 권했다. 어렵게 혼인을 결심받았지만 혼례를 치르려고 하자 돈이 없었다.

김향수는 그동안 스승으로부터 입은 은혜에 보답한다는 마음으로 논 20두락을 살 수 있는 돈 500원을 결혼비용으로 보태도록 내 놓았다.

결혼직후 무렵 닷다 스승은 고향에서 귀국하라는 독촉을 자주 받았다. 한명밖에 없던 동생이 전사하면서 홀어머니를 모셔야 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반드시 조선의 독립을 본 후에 일본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곤 했던 닷다 선생은 홀어머니 때문에 귀국길에 올라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그러나 김향수는 사업차 일본 나고야에 들렀을때 북쪽으로 5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후루가와(古川)에 있는 닷다선생의 고향까지 찾아가 뜨거운 재회를 하기도 했다.

김향수가 닷다선생의 고향을 찾아 갔을때 일본은 전쟁 때문에 극심한 생필품 부족현상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김향수가 준비한게 생필품이었다.

고급 일본 청주인 백학 2병, 세탁비누 2개, 설탕 2근, 면타올 세트, 일본산 모리나가 캬라멜 20개 들이 20상자였는데 당시에는 무척 귀한 것들이었다.

닷다 스승은 김향수가 가지고 간 선물을 온동네 사람들에게 일일이 나누어 주며 조선의 제자가 가져왔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던 스승에 대한 감사와 사랑은 이렇듯 김향수의 삶속에서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었다.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김향수 회장은 기업인이라는 직책 이외에 한일 고대사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역사가였다.

그는 1994년 경제기적을 이룬 일본을 역사적으로 조명한 ‘오늘의 경제기적을 이룬 일본, 그들은 누구인가’라는 책을 냈고, 우곡(김향수의 호) 역사기행이란 이름으로 1995년 ‘일본속의 한민족 혼’이란 역사책을 발간했다. 모두 자신이 현장을 찾아 일본속의 한국역사를 취재해서 적은 책이었다. 

그런데 김향수 회장이 한일고대 역사에 눈을 뜨게 된 것은 바로 닷다 스승 때문이었다고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

중앙초등학교를 다닐 때 닷사 스승은 “너희들 말 안들으면 어머니의 나라 소시모리(曾戶茂梨)로 보내 버릴거야!”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어린 김향수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성장하면서 두고두고 뇌리에 남아 있었고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생활하다가 다시 일본에 건너가 주경야독하고 있을 무렵이다. 동네 아이들이 장난을 치면서 노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아이들이 닷다 스승이 들려 주었던 소시모리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어머니의 나라 소시모리…’, 과연 어머니의 나라가 어디란 말인가. 이 의문은 결국 수십년이 지난 후 닷다 스승을 다시 만나서야 풀렸다. 둘은 다시 만났던 것이다.

김향수는 일본이 한창 태평양 전쟁에 몰입해 있을 당시 사업차 일본에 갔다가 닷다 선생을 찾아갔다. 꼭 다시 한번 뵙고 싶은 스승이었던 것이다. 이미 반백이 넘은 은사 부부는 김회장을 반갑게 맞이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김 회장은 보통학교 5학년 때 들었던 소시모리의 의미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어머니의 나라 소시모리란 바로 한반도를 지칭하며, 소시모리는 소머리(牛頭峯)의 일본식 발음(취음)이며, 예로부터 일본사회에서는 속담처럼 널리 사용되고 있다고도 했다.

당시 닷다 선생은 소시모리를 그때 근무했던 강진의 소머리봉(우두봉)에 비유해 ‘말 안들으면 너희 고향에 보내버린다’고 재미있게 표현했던 것이다.

1930년대 중반 김향수는 춘천의 우두산에 일제강점기 때 조그마한 신사가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곳을 현지답사 했다.

옛날 소시모리라 칭했던 우두산(牛頭山)은 시가지의 변두리 마을 「우두동」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김 회장은 우두산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틀림없이 소대가리를 닮은 데다가 바로 옆으로 휘돌아 흐르는 소양강이 일본 센다이(川內)시의 카미카메야마(神龜山)와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김회장은 또 우두산 인근 소양강변에서 가야의 땅이었음을 증명해주는 「가라목(加羅頂)」이라는 마을을 발견함으로서 일본인들이 말하는 소시모리는 6가야의 북단 강역이었던 춘천의 우두산을 지칭했던 것으로 짐작된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이에대해 김 회장은 “어쨌든 나는 은사 덕분에 일본의 고대문화 유적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이후 사업이 바쁜 중에도 일본에 들를 때에는 꼭 우리 조상의 얼이 담긴 문화유적을 답사하곤 했다”며 “특히 규슈지방의 가야유적 답사에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은 가야 김수로왕의 후손들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건국의 뿌리가 되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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