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용천시와 교류 시작 … 청자문화 발전 가속화

1975년 봄 신안군 증도면 도덕도 인근 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어부의 그물에 청자꽃병이 인양됐다.

이 배는 1323년 중국을 떠나 일본으로 출항하던 중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원나라 무역선이었다. 발굴된 청자는 중국 원나라 용천요(龍泉窯)라는 가마에서 만들어진 청자로 확인됐다.

1995년 7월1일 민선1기 강진군수가 취임하면서 지역에 산재돼 있는 민간요 업체를 한 곳에 집단화 시키는 청자촌 조성사업이 본격 시작됐다.

청자산업의 성공적 추진을 위해서는 1996년 청자를 소재로 제1회 청자문화제를 개최해 국내에 알리는데 초점을 두었다.

이와 함께 도자문화의 발상지인 중국과의 교류협력의 중요성도 대두됐다. 1997년 10월17일 전라남도를 통하여 중국 절강성내의 청자관련 자치단체를 추천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회신이 없어 추진할 수 없었다.

민선2기가 출범하자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원나라 무역선에서 건져 올린 청자꽃병의 고향 중국 용천시장이 1998년 11월30일 서신을 통해 교류협력을 희망한다며 강진군 관계자 방문을 요청했다.

강진군으로서는 중국과의 국제교류를 희망하고 있던 차에 중국 청자발상지인 용천시에서 교류요청을 해옴에 따라 교류가 시작됐다.

1999년 11월8일부터 13일까지 강진군수외 9명의 사절단이 중국 용천시를 방문해 청자관련 시설과 전통보검 제작과정 등 문화유적지를 둘러보고 상호교류, 협력관계를 모색했다.

실무책임을 맡았던 김병기 전 강진읍장은 용천시의 지리적 여건에 대해 “항주에서 용천시와 연결된 도로가 험난한 산악지역 산비탈에 개설된 비포장도로로써 상시 위험이 도사리는 상황에서 11시간 동안 가야하는 등 교통상황이 좋지 않았다”는 회고담이 있을 정도로 절강성과 복건성의 변경(邊境)에 자리하고 있는 도시이다.

지금은 항주에서 용천시에 이르기까지 4차선 고속도로가 개설되어 4시간이면 당도할 수 있는 청자와 전통 보검(寶劍)의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실로 중국의 엄청난 변화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는 도시임에 틀림없다.

1999년 용천시를 방문한 강진군수는 용천시장에게 강진군 방문을 공식 요청했고, 2000년 10월9일 이회광 용천시장외 3명이 강진군청을 답방했다.

이때 자매결연의향서 교환 및 협력사업 협의서에 서명하고, 다음날 고려청자박물관과 도예업체를 방문했다. 그 후 행정자치부의 승인을 받아 2001년 4월 27일 정식으로 자매결연을 체결했다.

2007년 제12회 청자문화제때 중국인민정부 용천시 조건림 당서기(용천시 행정 입법 사법의 총책임관)가 방문하여 3점의 용천 청자를 기증했다. 때에 맞춰 도예문화원 특별전시실에서 ‘중국 용천청자와 보검 특별전’을 기획하여 전시하고 있었는데, 북새통을 이룰 정도로 수많은 관람객이 관람했다.

강진군에서는 같은해 10월15일 제2회 용천청자 보검축제에 김응자 부군수, 노헤레나 성요세여고 교장, 황옥철 청자조합장, 박석환 행정혁신팀장, 현재 일자리창출과장인 이준범 동료와 함께 방문했다.

항주시에서부터 용천시에 이르기까지 차량안내와 환영만찬에 강진군 사절단 일행에게 극진한 예우를 해주었다. 특히 환영 만찬에는 당서기와 시장이 참석해 융숭한 환대해주었다.

기분 좋은 나머지 독한 환영주를 몇 잔 했는데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작 본인들은 색깔이 같도록 희석한 음료수를 음용했었다. 두 번째 방문에는 속지 않았지만, 국제교류에 있어서 중국인들의 배려(?)에 대해 참고할 대목이 아닌가 싶다.

당시 용천제1중학교와 성요셉여고간 국제 자매결연을 맺는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괄목할 만한 사항은 청자문화의 꽃을 피웠던 두 나라 도예가들이 자매결연을 통해 상호 방문 체류하면서 청자기법을 공유했던 일은 청자문화를 이어가는데 이정표가 아니었나 싶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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