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흐름에 따라 지역내 성씨별 인구 분포도 달라졌다

우리나라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강진군도 예외일 수는 없다. 1965년 127,878명이었던 강진인구가 2019년 35,286명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예부터 인구는 우리지역의 성씨의 분포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우리나라 성씨에 관해 송나라 신당서에 신라의 왕성(王姓)은 金이다. 귀인의 성은 朴이며, 백성의 이름은 있으되 氏는 없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렇듯 성씨가 없었던 지방의 유력자 층에게도 고려  초기에 남자 혈통을 나타내는 중국식 성씨제도가 확산되었고, 국가는 이를 통해 백성의 신원을 파악하고 운영하는 제도로 활용하였다.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 각 군현의 토성조(土姓條)에 기록된 여러 성씨들도 신라시기 귀족층의 성씨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같이 해서 성립된 성씨이었다.

강진현조(條)에 ‘강진현의 토성으로 도강(병영 일대)의 성이 4이니 金, 趙, 黃, 任이요, 망성(亡姓,떠나고 없는 성씨)은 表이다. 탐진(강진 남부지역)의 성은 6이니 崔, 曺, 兪, 安, 鄭, 河이요, 내접성(來接姓, 근래에 들어온 성씨)이 康(행주), 朴(영암)이다.

평덕향(군동 쌍덕)의 망성이 1이니 朴이며, 수운부곡(군동 풍동)의 망성이 2이니 曺, 吳요, 영가부곡(성전 영풍)의 망성이 1이니 申이다.

대곡소(군동 장산)의 속성이 1이니 曺요, 대구소(대구 당전)의 속성이 1이니 徐요, 칠량소(칠량 영동)의 속성이 1이니 白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본관은 어떻게 유래되었을까? 신라말 고려전기에는 본관과 관향이라는 용어가 고향 또는 국가가 제도상으로 공인 확인한 특정한 의미의 취적지 본적지의 뜻을 갖는 지역개념으로서의 본관으로 쓰여 지고 있었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본관은 주로 혈연의 연원을 가리키는 성관, 따라서 시조의 출자지(出自地)의 뜻으로 쓰여 지는 바가 많아졌다. 말하자면 관향은 후대의 족보상의 본관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서로는 조선후기 여지도서(1759~1765)로써 본관이 기록된 강진현내 18성씨가 나온다. 10대 성씨로 완산李씨, 해남尹씨, 평해吳씨, 창녕曺씨, 도강趙씨(풍양趙씨), 창원黃씨, 杞溪(기계)兪氏, 죽산安씨,  함양朴씨, 이천 徐씨이다.

그 다음으로 언양金씨, 장흥魏씨, 수원白씨, 청송沈씨, 탐진崔씨, 장흥任씨, 밀양宋씨, 선산林씨이다.

완산李씨는 지금의 전주李씨를 뜻한다. 또 도강趙씨는 당시 도강지역(강진북부 지역)에 거주하고 있어 본적지의 뜻을 갖는 지역개념으로서의 姓이었으나 풍양趙씨의 후손으로서 후대에 풍양趙씨로 합보(合譜)되었다.

본관제 관향제는 신라의 귀족층이외에는 중국식 성씨제도가 점차 확산되면서 백성의 신원을 파악하고 나라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기층제적인 제도가 되었다.

관향은 어느 가문이 어느 군현에 취적함으로써, 즉 그 가문이 그곳에 정착하고 뿌리를 내림으로써 국가에 대한 제반 의무를 그곳을 중심으로 지게 되고, 그 자신의 신원도 그곳 사람이 되는 것으로서 보장받게 된다.

강진군의 연도별로 본관 성씨를 살펴보면 1978년 발행된 강진향토지에 의하면 강진군 10대 성씨로 김해김씨 2,562세대, 해남윤씨 1,515세대, 밀양박씨 1,036세대, 전주이씨 754세대이며, 경주이씨, 청주김씨, 광산김씨, 함양박씨, 진주강씨, 탐진최씨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최근 조사된 2010년 성씨별 인구통계에 의하면 김해김씨 2,621세대, 해남윤씨 1,194세대, 밀양박씨 1,091세대, 전주이씨 784세대, 광산김씨 691세대이며, 경주이씨, 진주강씨, 청주김씨, 경주김씨, 탐진최씨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우리 고장은 예부터 ‘동순천 서강진’이라 불릴 만큼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이 순후하여 살기 좋은 곳이다. 다수의 성씨들이 자작일촌을 이루면서도 이웃 성씨들과 협동으로 성장을 거듭해 왔다.

이제 귀촌 귀농인은 물론 외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끈끈한 정과 유대관계를 맺으면서 조상이 물려준 값진 유산을 계승 발전해 나가기를 바란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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