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최초자동차는 1921년 오동준 사장의 7인승 포드였다

2020년 4월말 현재 강진군에 등록된 차량은 19,601대이다. 거리에 차로 넘쳐나는 시대이다. 그렇다면 강진에서 처음 자동차를 구입해 탄 사람은 누구일까. 최초 강진의 자동차는 1921년 동화자동차부 오동준 사장의 7인승 포드차였다. 아마 이 차량으로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버스나 택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 강진의 도로는 강진읍~마량간 도로가 있었고 1908년 해남 우수영에서 마산간 도로가 새롭게 개설됐으며 이듬해인 1909년에는 강진읍~성전~영암~영산포간 도로 설치됐다. 강진~목포간 도로는 일제 강점기때 부설됐고 장흥~나주간 도로도 있었다. 1930년에는 강진읍에 최초로 전기가 공급되던 해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강진의 자동차 변화 추이를 살펴보자. 1962년 말 차량등록대수는 총 38대로 관용차 4대, 자가용 1대, 영업용이 33대였다. 25년이 지난 1987년에는 27배가 증가한 1,021대로 자가용은 767대로 기록돼 있다. 이때 당시 강진의 인구가 77,894명인 점을 감안해 볼 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중교통을 이용했던 때였다.

그러다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이후 국가위상은 올라갔고 경제성장 하면서 자동차도 빠르게 늘었다. 1990년에는 2,139대로 늘었고 이 중에서 자가용은 1,836대로 급증했다.

당시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군청 직원들 중 자가용 보유 공무원은 없었다. 이때문에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관용차를 배차 받아 출장을 가곤 했었다.

군수, 부군수, 특수 목적의 차량을 제외하면 4~5대 안팎의 관용차를 이용해야 하는데 읍면 출장수행을 위해서는 배차를 받아야 했다. 실과 서무 담당자는 당일 급한 공무가 있을 경우 관용차 배차를 배정받기 위해 출근과 동시에 담당 공무원에게 통사정해야 했다.

힘없는 부서는 배차전쟁에서 밀려나기 일쑤였다. 당시 배차공무원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배차전쟁을 해야 하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이런 진풍경이 연출되다보니 자가용을 구입하려는 공무원들은 있었지만, 공직자란 이유로 쉽사리 자가용을 구입하여 탈수도 없었다. 직원들은 오토바이를 구입해 출장에 임하는 수밖에 달리할 방법이 없었다.

이 때 뜻밖의 상황이 발생했다. 관내에 거주하는 공무원이 농사도 지을 겸 공적 출장수행을 목적으로 뒷칸에 수화물을 적재할 수 있는 포니픽업을 구입하여 출퇴근을 하는 공무원 한 분이 있었다.

차량을 구입하여 출퇴근하고 있다는 동향이 상부기관에 접수되었는지 상부 감사담당 공무원이 포니픽업 보유 공무원을 소환하여 자금출처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사하면서 비리와 개연성이 있는지 살펴보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물론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회상해보면 차량이 귀하던 시대에 국민정서에 어울리지 않다는 상부기관의 판단이 작용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 후 자가용 시대를 맞이한 시대에도 수많은 공직자가 차량을 구입하면서도 군수 차량의 배기용량보다 높은 차량을 구입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IMF 국제구제금융 이후 2000년을 맞아 외환위기 극복으로 국민소득이 1만 달러 시대로 접어들자 차량보유대수는 9,619대로 증가하여 그 중 자가용은 9,040대로 우리군 18,111세대 중 50%가 보유하게 되었다. 10년 전인 1990년 자가용이 1,836대로써 10세대당 1대였던 점에 비교해볼 때 현저히 증가했음을 눈여겨볼 수 있다.

2020년 4월말 현재 강진군의 차량등록대수는 19601대이다. 이중에서 자가용이 11,592대로 4월 말 강진군의 세대수가 18,436가구이기 때문에 자동차 대수가 세대수를 앞질렀다. 약 한 세대당 1.06대꼴로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비록 집이 없이 사글세방에 살더라도 자가용은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시대에 비춰볼 때 격세지감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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