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든지 꽃이 피면 산보를 하였다

석남팔경의 제2경에 해당되는 「석문의 흐르는 폭포」다. 석문공원에서 조금 올라가면 보이는 곳이다. 오한규 선생은 이 폭포를 ‘한줄기 냇물이 내리 쏟아질 때 옥색가루가 온 산 골짜기에 가득하며 물에다 먼지 낀 감을 씻고 때 묻은 발을 씻으면 상쾌한 기분이 솟는다’고 표현했다. 사람의 눈에 잘 띠지 않은 곳에 있는 이 폭포는 지금도 힘찬 물살을 자랑한다.
석남팔경의 제2경에 해당되는 「석문의 흐르는 폭포」다. 석문공원에서 조금 올라가면 보이는 곳이다. 오한규 선생은 이 폭포를 ‘한줄기 냇물이 내리 쏟아질 때 옥색가루가 온 산 골짜기에 가득하며 물에다 먼지 낀 감을 씻고 때 묻은 발을 씻으면 상쾌한 기분이 솟는다’고 표현했다. 사람의 눈에 잘 띠지 않은 곳에 있는 이 폭포는 지금도 힘찬 물살을 자랑한다.

봄이 깊다. 어딜 가도 좋고, 어딜 보아도 즐겁다. 도암과 신전 일대는 바위산이 많다. 이곳에 꽃이 피면 그 아름다움은 배가 된다. 일찍이 우리 조상들은 이 일대의 아름다움에 반해 여러 가지 글을 남겼다. 초여름이 오기 전에 조상들이 예찬한 도암 신전의 경치를 풍람해 보는게 어떨까. 이번 인문기행은 만덕산에서 남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바위산의 묘미를 옛 기록을 통해 유람하는 과정이다.
다산선생은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도암 신전 일대의 바위산 풍경을 즐겼다. 다산이 남긴 조석루기(朝夕樓記)란 기록을 보면 그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다산에 거처한 지 4년이 되는데, 언제든지 꽃이 피면 산보를 하였다. 산에서 오른쪽 고개하나를 넘고 시내 하나를 건너 석문에서 바람을 쬐며, 용혈에서 쉬고 청라곡에서 물마시며, 농산에 있는 농막에서 묵은 뒤에 말을 타고 다산으로 돌아왔다’

유배중 산책 즐긴 다산선생

도암 석천마을 뒷산 합장암 터에 있는 암벽사이에 작은 샘물이 있다. 석천(石泉)이다. 이곳은 지금도 물이 마르지 않은 샘이다.
도암 석천마을 뒷산 합장암 터에 있는 암벽사이에 작은 샘물이 있다. 석천(石泉)이다. 이곳은 지금도 물이 마르지 않은 샘이다.

언제든지 꽃이 피면 산보를 했다는 표현이 대단히 시적이다. 여기서 석문이란 대석문 계곡을 의미하고 용혈은 지금의 만덕광업 옆 용혈암 주변을 말한다. 청라곡은 용혈암 주변인 동백나무골을 뜻한다. 당시 덕룡산 주변의 아름다움을 손에 잡힐 듯 전해주고 있다. 농산은 해남윤씨 휴양지를 의미한다. 해남윤씨 별업은 농산별업이라고 하는데 조상들의 묘와 가까이 있어서 효를 위한 별장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도암 만덕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선생이 지금의 도암 마점마을 마티재를 넘어 석문공원이 있는 대석문을 지나 석천마을 길을 돌아 덕룡산 등산로 입구가 있는 소석문에서 잠시 쉬었다. 그곳에서 깎아질듯한 암산을 감상하고는 곧장 신리마을을 거쳐 용혈암으로 올라가 강진만을 바라 보았다. 이 코스는 지금 돌아도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용혈암 아래에 해남윤씨 별업으로 가서 하룻밤을 보내고 말을 타고 다시 만덕리 초당으로 돌아갔다. 말을 탔다니 아마도 해남윤씨 문중 사람들이 내어줬던 것으로 보인다. 농산별업 자리는 아침에 해가 떠서 저녁에 해가 질때까지 햇빛이 비치는 곳으로 도암면에서 햇빛이 가장 잘 드는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윤정현 선생의 글에 따르면 다산은 이처럼 연례행사처럼 요즘처럼 꽃 피는 봄이 오면 성자동 고개 마티재를 넘어 외유를 떠나곤 했는데, 다산이 떠나온다는 기별을 해오면 곧바로 친구 윤서유가 말과 함께 사람을 보내서, 석문에서부터 술잔을 기울이게 하곤 했다. 낙지와 은어를 즐겨 먹었다니 이즈음으로 따져봐도 어지간한 ‘미각’들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소석문을 지나서 백련결사의 4대 주맹이었던 진정국사가 말년을 보냈던 용혈암을 지나, 그 아래에 있었던 농산별업에서 친구와 만나 초당에서의 학문활동에 지친 육신을 쉬었다.

도암 신전은 온통 명승지

다산선생이 즐겨 찾았던 신전면 월하마을에 있는 해남윤씨 농산별업. 뒤쪽으로 덕룡산 자락이 아스라이 펼쳐지고, 남동쪽으로는 따뜻한 햇살이 하룻네 들어오는 명지다.
다산선생이 즐겨 찾았던 신전면 월하마을에 있는 해남윤씨 농산별업. 뒤쪽으로 덕룡산 자락이 아스라이 펼쳐지고, 남동쪽으로는 따뜻한 햇살이 하룻네 들어오는 명지다.

다산은 이곳에서 주작산 암벽을 바라보며 노닐었다. 농산별업에 있었던 12승경 중 ‘앵자강(鸚子江)’이라고 불렀던 앵무새가 우는 강, 즉 숲을 강으로 묘사했던 그 숲 너머에 있던 주작산을 바라보며 다산은 정조임금을 모시고 조정에서 일하며 바라봤던 도봉산과 인왕산의 바위들을 생각했다.
도암 월하정과 신전 수양리에 걸쳐 있는 농산별업에서 보는 주작산은 주봉의 크고 검은 바윗돌과 큰골, 작은골 봉우리의 바윗돌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마치 자신이 예전에 봤던 도봉산이나 인왕산의 그것과 닮아있어서 자주 옛날의 회억에 잠기곤 했었다.
농산별업의 12승경 중에는 ‘녹음정(鹿飮井)’이라는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논으로 쓰기 위해 메워버린 그 우물은 그 위 덕룡산의 사슴들이 내려와 물을 먹는다는 샘이다. 그 사슴의 몸체처럼 덕룡산의 바위는 상서롭기 그지없는 온통 하얀색이다.
대석문, 소석문, 만덕산, 봉덕산, 덕룡산으로 이어지는 봉우리들 석남팔경이란 이름으로 노래한 한학자가 있다. 군동 화방에서 태어나 1870년에 도암 성자마을로 옮겨 살았던 송하 오한규(松下 吳漢奎 1838-1908)선생이 그 사람이다.
오한규 선생은 평해 오씨다. 강진에서 활동한 조선후기 대표적인 한학자였다. 그가 쓴 여러 가지 글을 모은 송하유고가 전해지는데, 동학혁명 당시 강진과 장흥에서 일어난 일이 많이 수록돼 있다. 동학혁명 후 그가 남긴 재미 있는 기록이 있다.
1894년대 말 동학혁명으로 강진이 초토화 된 후 중앙정부내에서는 강진군을 영암군에 부속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군동면 화방마을 출신 송하(松下) 오한규선생은 상급관청에 다음과 같은 호소문을 올려 강진의 중요성을 알린다.

석남팔경 지은 오한규 선생

<강진현은 바다와 가까운 중요한 땅으로서 강진현에서 직선거리로 1000리나 떨어져 있는 제주는 옛날의 탐라국입니다. 그 때 신라에 입공한 성자가 본현앞 나루터에 와서 정박하였으므로 본 현을 탐진이라 하였습니다. 선조때 하교하기를 제주도가 전라도의 지휘를 받게 해서 혹시라도 급박하거나 이상한 변고가 있으면 맨 먼저 강진현에 알리고 강진현은 바로 임금께 아뢰라는 사실을 현판에 새겨서 군수의 집무실인 동헌의 높은 곳에 내어 걸도록 하였으니 강진을 소중히 여기고 엄중히 여기게 함은 다른 고을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제주에서 본토로 입공함에 선로의 요충지로 보아도 그 중요한바가 더욱 커서 독립된 읍이 될 만하며 땅 또한 타군에 부속하는 것은 마땅하지 아니합니다.>
이 글은 강진문화원이 1996년 발행한 ‘송하유고’란 책에 실려 있다. 관심을 끄는 것은 강진원님의 집무실에 ‘제주에 급박한 변고가 생기면 맨 먼저 강진현에 알리고 강진현은 이를 바로 임금께 아뢰라’는 현판을 걸어 두었다는 것이다.
당시 강진과 제주가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송하선생의 호소문 때문이었을까. 그후 강진은 영암에 복속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강진이란 독립된 행정구역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 송하선생이 도암 신전의 풍광을 석남팔경을 통해 찬탄한 것이다. 아마도 군동에서 기거하다가 도암 성자마을로 이주해서 적은 것으로 보인다. 그 풍경을 따라가 보자. 풀이는 청광 양광식 선생의 글에서 인용한다.

백련사 새벽종이 1경

제1경은 「백련사 새벽종」이다. 백련사는 만덕산이 에워싸고 바다의 경치가 좋고, 만경루와 만월대가 장엄하며 새벽이면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와 더럽힌 마음을 깨닫게 해준다.
제2경은 「석문의 흐르는 폭포」다. 물맞이 폭포를 의미한다. 아미산 같은 두 봉우리 사이로 길이 뚫려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대문을 드나드는 것 같고, 풀, 나무, 단풍숲이 사람의 눈길을 끌고 한줄기 냇물이 내리 쏟아질 때 옥색가루가 온 산 골짜기에 가득하며 물에다 먼지 낀 감을 씻고 때 묻은 발을 씻으면 상쾌한 기분이 솟는다.
제3경은 「합장암의 차가운 샘」이다. 석천 임억령(1496-1568) 옥봉 백광훈(1537-1582). 약천남구만(1629-1770). 농암 김창협(1651-1708)등이 노닐었고, 암벽이 수백 척 솟았으며 두 손바닥을 마주 합한 것 같으며 갈라진 틈에서 석류수가 흐르며 물맛이 지극히 시원하다.
제4경은 「용 못의 헤엄치는 물고기」이다. 지름바우가 있고 위쪽에 정자를 짓기 좋은 석실이 있다. 옥천의 물이 흘러와 너댓자 깊은 못이 되고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모습이 아침이나 저녁노을이면 더욱 보기가 좋다.
제5경은 「능허대의 서늘한 바람」이다. 위쪽에 용혈이 있고 그 안에는 우물이 있으며 밖에는 초은암(招隱菴)이 있는데 불덩이 같은 음력 8월에도 맑은 바람에 시원해진다.
제6경은 「합섬의 돌아오는 배」이다. 금강과 잇닿고 남정네는 농사짓고 소금구우며 태평가 부르고 아낙은 전복을 딴다. 고깃배는 나루에 대고 남당포(南塘浦)엔 장삿배가 닿는다.
제7경은 「옥전 사경의 저녁때 햇빛」이다. 가랑봉과 부여치(婦與峙)가 있으며, 미녀가 단정히 앉아 금비녀를 땅에 던져놓은 형극이다. 오후3시 이후의 목동의 피리소리와 나무꾼들의  노래 소리가 있다.
제8경은 「두륜봉의 비가 그치고 개인 하늘에 뜬 달」이다. 살던 집 뒤에 있다. 여러 곳 경치를 둘러보고 돌아 올 때면 해지고 달이 떠올라 명월시(明月詩)를 읊는다. 벽에 등불이 걸리고 마당엔 청색의 보옥빛이요, 방엔 글을 읽고 누각엔 반가운 손님이 기다리고 있어 달과 함께 즐겼다 라고 끝을 맺었다.

풍수지리 빼어난 도암 석천마을

석남팔경을 유람하려면 눈여겨 봐야할 마을이 있다. 도암 석천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예전부터 좋은 풍수지리로 유명하다. 마을의 뒤에는 합장산이 자리하고 있고 멀리 마을 앞 항촌마을 방면에는 용머리가 있다.
합장산은 호랑이가 앉아있는 형국이라는 말이 있는데 용과 호랑이가 마을을 감싸고 있다고 전해오고 있다. 또 마을 앞으로 작은 하천이 흐르고 있어 전형적인 명당 자리라 불리우는 배산임수 지형이다.이 때문에 예전부터 으뜸은 항촌이요 두 번째는 석천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시대때는 항촌과 석천이 양반마을이라는 의미로 반촌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만큼 석천마을은 물이 좋고 풍광이 좋았다는 의미이다. 석남팔경도 그런 의미에서 탄생했다고 생각된다.석남팔경중 3경에 해당하는 합장암의 차가운 샘은 돌틈에서 흐르는 물 맛이 최고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마을 이름처럼 석천의 물맛은 최고다.
예전에는 각 집마다 샘이 있었고 마을내 신창균씨 집에는 큰샘물이 있어 마을주민들이 함께 사용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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