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따른 순회전으로 세계에서 강진청자의 위상 높아졌다

강진청자가 일본에 이어 미국 순회전시회까지 무사히 끝났다. 공직에서 퇴직한 요즘에도 그 시절을 회상해보면 그때만큼 힘들었던 경험이 없었던 것 같다. 나의 40여년 공직생활 중 강진청자 미국 순회전시회는 준비에서부터 행사 개최까지 가혹하리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내가 가보지도 못한 미국의 주요 도시에서 전시회를 열고 관람객을 끌어모으기란 말로 형언할 수 없이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들을 전시회에 오게 만들기 위해서는 미국 개최도시 교포사회의 관심을 유발해야만 했다. 이는 홍보물을 발송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고 우리는 홍보물 발송 대상자 파악부터 어려움에 부딪쳤다.

우리는 주소 파악을 위해 강진군청 각 실과소장과 주요 읍‧면장에게 미국에 거주하는 친인척과 지인 등을 통한 주소를 파악했다. 처음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상당수의 교민 주소를 입수했다. 부족한 부분은 한인회 회원 명부와 미주 중앙일보 등을 이용해 교민들의 추가 주소를 파악해 총 8,120명의 주소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우리는 미국 순회전시회 소식을 담은 군수 서한문을 고급스러운 한지(韓紙)에 인쇄해 국내에서 항공우편으로 미국 교민들에게 발송했다. 이때 순회전에 참석했던 한 교민은 한국에서 항공우편으로 보내온 한지에 새겨진 강진군의 초청장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다면서 다른 일정이 있음에도 일정을 미루고 참석했다고 말하기도 해 보람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또 워싱턴 D.C.와 뉴욕전시회 이외의 4개 도시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 교수를 소개 받아 추진했다. 몇몇 교수는 고려청자박물관측과 사전 협의도 없이 임의대로 전시회를 진행하는 등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박물관을 힘들게 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워싱턴 D.C. 스미소니언과 뉴욕 행사는 현지인을 고용해 추진하다보니 의도와는 달리 득보다는 해를 끼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결국 고려청자박물관에서 미국대사관과 각 지역의 총영사관과 한국문화원 관계자들과 유대 관계를 맺으면서 직접 행사를 추진하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나를 비롯해서 고려청자박물관내 많은 직원들이 함께 고생하고 노력한 덕분에 미국 순회전시회도 큰 사고없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강진군과 강진청자는 일본에 이어 미국전시회가 끝나고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우선 미국의 시민과 교민들에게 강진 고려청자의 예술성과 아름다운 비취색의 도자기를 다양하게 보여줌으로써 강진청자의 가치를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강진청자 순회전은 일본에 이어 미국 주요도시를 순회하면서 연이어 진행했는데 이는 강진 지역 청자 작가에게도 큰 자부심을 안겨준 대형 프로젝트 사업이었다.

특히 국내 TV와 신문 등 언론사들의 열띤 취재를 통해 강진청자 순회전 소식의 대대적인 홍보로 국내 도자산업의 발전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강진청자의 우수성을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소비자들에게도 알림으로써 강진청자의 판매고를 높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강진청자 산업 발전을 위해 노력해왔던 나는 누구보다 강진청자를 사랑한다. 그동안 청자산업 발전을 위해 민간요와 강진군이 힘을 합쳐 대대적 홍보를 해왔고 이를 통해 청자산업이 지역 경제의 한축을 담당해 왔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들려오는 강진 청자에 관한 소식들은 우울한 소식들뿐이라 안타깝다.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청자산업육성 사업 추진과정에서 파생된 불협화음을 다 함께 힘을 모아 극복하길 바란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지역 작가들이 상호 화합하고 단합해 위기를 상생 발전하는 계기로 삼아 고려시대 영화로운 천년의 신비를 계승해 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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