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력이 풍부한 곳은 통영과 전라병영 뿐이다’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에 있는 옛 통제영 관아 건물의 모습이다. 한때 전라병영과 쌍벽을 이루던 군사기지였다. 이곳에는 세병관(국보 305호)이란 본부 건물이 있는데 지금의 강진 병영면 병영성 내부에는 이 보다 더 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발굴조사 결과 나왔다.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에 있는 옛 통제영 관아 건물의 모습이다. 한때 전라병영과 쌍벽을 이루던 군사기지였다. 이곳에는 세병관(국보 305호)이란 본부 건물이 있는데 지금의 강진 병영면 병영성 내부에는 이 보다 더 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발굴조사 결과 나왔다.

지난주 일본에서 코로나19가 급속히 확산되자 언론에서는 일본정부가 벚꽃이 만개한 때에 관광통제를 하지 않음으로서 코로나를 창궐시켰다고 비판했다. 일본은 벚꽃의 나라다. 일본인들 역시 벚꽃을 좋아한다. 코로나 확산 우려 보다는 벚꽃 구경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일본에서 벚꽃 명소가 많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억속에 또렷한 곳중의 하나는 오오사카성의 벚꽃이다. 오오사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쌓은 오사카성도 유명하지만 일본의 3대 전통상인인 오사카상인도 유명하다.

지난주 인문기행을 코로나19 때문에 축제가 취소된 전라병영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아무래도 아쉬워서 병영상인에 대한 설명을 좀 더 하기로 한다.

군영 주변에서 성장한 상인들

군사성과 상인이 얼른 이해되지 않은 면도 있기는 하지만 전라병영성은 병영상인 없이는 유지가 불가능했고, 병영상인은 전라병영성이 없으면 생존이 어려웠다. 그럼 그 관계를 얼른 이해하기 위해서 다른 사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일본의 사례가 빠를 것 같다.

복원된 전라병영성의 모습
복원된 전라병영성의 모습

우리나라도 전통상인이 있지만 외국에도 전통상인이라는 게 있다. 학자들의 기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중국에는 절강상인, 온주상인, 광둥상인을 3대상인이라하고 일본에는 오사카상인, 교토상인, 이세상인을 그렇게 부른다.

우리나라는 개성상인, 경강상인, 의주상인등을 3대상인으로 꼽았으나 요즘에는 의주상인은 접고, 개성상인과 경강상인에 병영상인이 들어가는 추세다. 그만큼 강진의 병영상인 위상이 높아졌다. 부산의 동래상인 이름이 있으나 사실 내부적으로 동래상인의 존재는 극소수였다.

그 부분은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외국의 전통상인중에 군사시설 주변에서 성장한 오사카상인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물론 이런 과정이 모두 병영상인의 존재를 분명히 하고자 함이다.   

군사시설 주변에서 상인 세력이 탄생한 것은 일본의 오사카상인 사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83년 일본 천하를 통일했다.

그가 통일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오사카 城(성)의 축조였다. 오사카 성은 10만여 명의 인부를 동원, 일사천리로 지어져 공사 착공 3년 만인 1586년에 완공됐다.

성 축조를 준비하면서 히데요시가 가장 먼저 한 일중의 하나는 오오사카성 주변에 상인들을 불러 모아 서민가(상공업지역)라는 곳을 만드는 것이었다. 성 아래 서민가에서는 무사들의 소비구조에 부응하기 위해 상인사회가 형성됐다.

상인들은 무사들이 소비하는 물품을 공급하는 한편 각지에서 해운이나 하천을 통해 오오사카성으로 들어오는 공납미를 실어 나르는 역할도 했다. 쌀을 실어 나르기 위해 오오사카와 에도(도쿄)간에 정기항로가 생긴 것을 시작으로 18세기부터 전국 주요항만으로 항로가 연결되면서 오오사카는 쌀을 시작으로 중요상품의 최대 집산지가 됐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게 오오사카상인이다.

오사카 성 내 니시노마루 정원이라는 곳에는 약 300그루의 벚나무가 심어져 있어 봄이 되면 장관을 이룬다. 성앞에 예전 성을 쌓던 초창기에 상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장소가 있다.
오사카 성 내 니시노마루 정원이라는 곳에는 약 300그루의 벚나무가 심어져 있어 봄이 되면 장관을 이룬다. 성앞에 예전 성을 쌓던 초창기에 상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장소가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본래 바늘장수 출신인 데다가 전쟁을 치르면서 상인의 힘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상인이 화를 내면 천하의 제후도 놀란다”는 말처럼 도요토미는 자신이 일본을 통치하기 위해 상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 하카다(후쿠오카)의 거상인 가미야를 찾아가 다회를 베풀면서 협력을 구했다.

가미야는 하카다의 거상일 뿐 아니라 해운업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로부터 물자와 배를 빌리지 않고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의 상인을 오사카로 끌어 모았던 것이다.

현재 오사카에는 100년 이상 된 점포나 중소기업이 500여 개나 있다. 우리나라는 전체적으로 100년 이상된 점포나 기업이 6개에 불과하다. 오사카상인들은 수백 년간 점포마다 나름대로 상도를 가지고 살아왔다. 그들이 수백 년간 장사하면서 보고 배우고, 듣고 느낀 것들은 상인의 유전자가 되어 후손들의 피 속에 흐르고 있다.

오사카상인 지금도 유명

오래전 군사시설 주변에서 탄생한 상인의 사례를 일본에서 보았으니, 이제는 국내에서 그 사례를 찾아 보겠다. 조선시대 경남 통영에 설치된 통제영이 그곳이다. 전라병영이 전라남북도와 제주도를 관할하는 육군의 본부였다면 통제영은 우리나라 해군의 총 본부였다.

통제영은 전라병영이 강진으로 이설한 187년 후인 1604년에 설치됐다. 조선은 임진왜란이후 수군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는데 삼남지역 수군의 지휘체계를 일원화하기 위해 통제영 휘하의 광활한 수군체계를 세웠다. 통제영은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 해안지역 61진 42현을 관할했다.

통제영이 지금의 통영시에 설치되기 전까지 통영은 두룡포라는 이름을 가진 거제도에 속한 작은 어촌마을에 불과했지만 통제영의 설치와 함께 번성한 도회지로 자리 잡았다. 통제영은 군수품 수급을 위해 전국 공인을 불러들여 성 주변에 나전칠기와 함께 갓, 소반, 소목, 대발, 누비, 부채, 그림, 칼, 장석 등 관급물품을 조달하는 12공방을 세웠다.

이들이 사용하는 부속건물이 무려 71칸에 달했다고 한다. 여기에 종사하는 인력도 막대해서 전성기에는 최고 431명의 장인들이 각 공방에 소속되어 철저히 분업화된 체계로 물건을 만들어 냈다. 장인들의 숫자가 400여명에 달했다면 거기에 딸린 식구들과 부품을 제공하는 사람등 연관 직업군까지 감안하면 12공방이 통영에 끼친 경제적 영향력은 막강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통영의 공예품은 통제영에 납품하는 한편 전국최고 수준을 자랑하며 전국에 유통됐다.

조선시대 멋을 아는 남성들이라면 ‘통영 갓’을 구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 등 통영의 12 공방에서 생산된 물품은 조선 전역에서 생활용품 중 ‘명품’으로 통했다. 지금도 통영에 가면 12공방의 전통을 잇는 장인들이 인간문화재로 지정돼 활동하고 있다.

지난호에 소개했듯이 조선 영조실록(1727. 10. 24)에 나오는 ‘동남쪽의 여러 병영가운데 물력이 풍부한 곳의 통영과 전라병영 뿐이다’는 기록은 허튼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라병영과 통제영은 조선시대 호남과 영남의 양대산맥으로서 큰 물산의 중심지였고 상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곳이였으나 조선말 일제강점기로 접어들어 군사체계가 변화하면서 문을 닫고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병영과 통영은 그후로 정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전라병영이 있던 병영은 군사시설의 폐쇄와 함께 끝없는 쇄락의 길을 걸었지만, 통영은 조선시대의 번영을 발판으로 일제강점기들어 가까운 일본과의 교역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큰 도시로 성장했던 것이다. 오늘날 강진 병영면과 경남 통영시의 모습이 그 결과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라병영성에 상업세력이 발달한 재미있는 또다른 이야기가 있다. 병영주민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말이다. 전라병영이 운영될 당시 전라도 각 현은 병영성 주변에 일종의 현지 사무소를 두고 직원을 파견하고 있었다. 그들이 상주하는 곳을 현의 이름을 붙여 ‘장흥집’ ‘해남집’ ‘목포집’ ‘제주집’ ‘전주집’ 등으로 불렀다.

해남집,  장흥짐, 제주집

그들의 임무는 통신시설이 없던 시절에 병영성과 해당 현의 업무연락을 맡는 기능이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지휘관인 병마절도사의 동향을 보고하는 것이었다.

새로 부임한 병마절도사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취미생활을 하는지, 무슨 술을 즐기는지 하는 것을 현에 알려야 했다. 당시 병마절도사의 직급이 종 2품직으로 종 6품에 해당되는 현감보다 4단계나 높은 벼슬이었기 때문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병마절도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경쟁적인 노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주목사도 종3품직으로 전라병마절도사 아래에 있었고, 지금의 광주광역시는 일개 주에 불과했다. 또 병마절도사의 평균 임기가 평균 2년 2개월 정도로 자주 바뀌는 편이었기 때문에 신임병마절도사와 그 아래 고급 장교들의 성향과 동향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병마절도사가 인삼을 좋아한다고 하면 병영상인을 통해 개성이나 금산에서 인삼을 구해오게 했고, 좋은 갓을 수집한다고 하면 제주까지 상인을 파견했다는 것이다. 병영상인은 현지에 가면 해당 물건만 사오는게 아니었다. 그곳에서 생산되는 다른 특산물도 구입해 와 병영에 유통시키면서 상업 활동을 확대해 갔다.

이에 대해 김갑현 전 병영면장은 이렇게 말했다.
“1990년대 초반에 병영면마을사 편찬을 위해 향토자료를 모으는 과정에서 옛 어르신들이 장흥집이나 해남집과 같은 현의 사무실 운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도 각 현의 사무실은 동학군에 의해 병영성이 함락되기 직전까지 운영돼 주민들 사이에 구전으로 내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김 면장의 말은 계속된다.
“각지의 수령들이 유사시 징발권을 가진 병마절도사의 동정을 살피고 때론 대신 선물도 전달하는 연락 관리를 두어 그들이 각각 지정객주에 머물렀고 이름마저 어느 고을 객주라고 고유명사까지 붙었다. 지방에서 오는 관리나 사람들은 그 지방 특산물을 가져와 팔았기 때문에 어느 지방에서 무슨 물건이 나고 또 시세가 어떤가를 알 수 있어 병영은 요샛말로 상업정보가 빠른 곳이었다”

병영면 일대는 그렇게 전라남북도 제주도 각 현에서 연락책들이 상주하던 요즘 같으면 세종특별시 같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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