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년, 그러니까 12세기 고려 예종때의 일이다. 고려청자가 최고의 예술로 꽃필때였다. 이때 청자의 비색이 가장 아름다웠다. 상감청자도 이때 니왔다. 지금 국보급 청자들이 대부분 당시에 강진에서 만들어져 개경으로 보낸 것들이다. 그런데 고려청자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에 아주 처참한 전염병 기록이 있다.

고려사등에 따르면 1100년 부터 개경에 중국에서 들어 온 ‘온역(溫疫)’이라는 큰 역병이 돌았으며 고려 예종 4년(1109)에는 ‘개경거리에 시체가 넘쳐났다’고 한다. 이와 관련 연세대학교 의학사연구소 이현숙 교수는 “12세기 고려는 역병의 시대였다”고 했다. 결국 예종임금도 1124년 4월 이 온역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된다.  

온역은 요즘 현대의학용어로 ‘유행성 열병’ 정도로 해석되고 있다. 예종임금도 이 전염병으로 죽은 것으로 봐서 궁궐주변의 귀족들과 일반인들도 속수무책으로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럼 강진은 당시 어떠 했을까. 2007년 태안앞바다에서 발견된 청자유물에서 보듯이 12세기 중엽에도 강진에서 개경을 오가는 청자선이 있었다. 옛날 역병은 상인들과 뱃길을 통해 전염됐다.

개경은 중국 상인(華商)들은 물론 아라비아 상인(回回商)들까지 제집 안방 드나들 하는 곳이었다. 그곳을 강진의 청자 짐꾼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청자선 한척에는 최소한 10명 이상이 탑승했다. 개경을 오갔던 강진의 선원들은 바이러스 수퍼 전파자였다.

관심을 끄는 것은 ‘역병의 시대’였던 12세기가 지나면서 청자가 급속히 쇠락했다는 것이다. 청자가 쇠퇴한 이유에 대해 고려후기 고려 집권세력의 정치력 약화와 이에따른 청자 소비의 감소라는 학설이 지배적이지만 문화라는게 그렇게 두부 자르듯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려청자는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들어 급격한 쇠퇴를 거듭하지만 고려왕조는 청자가 쇠퇴한 후에도 1392년 멸망하기까지 200여년 이상을 버티었다. 고려 지배층의 정치력 약화만으로 청자의 쇠락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그것보다는 청자의 앞길을 가로 막은 주범은 바이러스였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역병 때문에 거리에 시체가 넘쳐나고 임금까지 죽었던 개경에서 청자 소비는 급감했을 것이다. 또 개경을 휘저었던 역병이 청자선을 타고 강진까지 내려와 청자 생산기반을 초토화 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청자를 죽인 주범은 전염병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전염병의 역사에 청자를 끼워 넣으면 다양한 상상력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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