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나라 지켰던 봉수대 돌무더기만 남아 있었다

정년퇴직후 나의 고향인 마량을 찾을때면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 주인공은 바로 강진군향토유형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된 남원포 봉수대이다.

이 봉수대는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 업체 관계자들과 함께 설계도와 씨름하고 거의 매일 봉대산 정상에 오르면서 복원 공사를 지휘했던 시절이 생각난다. 그만큼 많은 애정을 갖고 복원했던 곳이라 아직도 기억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내가 태어난 산동마을과 그리 멀지 않은 마량면 원포리 산41번지 봉대산 정상에 아주 오래된 봉수대가 하나 있다. 이 곳이 바로 남원포 봉수대인데 해발 358m 높이에 위치하고 있다.

역사적 기록으로 봉수대의 연혁을 살펴보면 이 봉수대는 고려시대 의종 3년인 1149년 각도에 있던 봉수대 시설을 정비하기 시작해 조선시대 세종 20년에 완비되었다.

이때 전국에 633개소 봉수대가 정비됐고 전라도에는 43개소, 강진현에는 마량 남원포와 해남 북일 좌곡과 완도 등 3개소가 설치됐다. 이때 세종실록지리지를 살펴보면 오늘날 부르는 봉대산이 아닌 거차산(巨次山)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봉수대는 적군이 침입했을 때 오늘날 전화와 같은 비상연락망 같은 역할을 했다. 낮에는 주로 연기를 이용했고 밤에는 불빛을 신호로 수도까지 적군의 침입 사실을 빠르게 알렸다.

신호방법은 평소에는 한 번 연기나 횃불을 올리지만 적이 나타나면 두 번 올리게 된다. 그리고 적이 국경에 나타나면 세 번, 적이 국내에 들어오면 네 번, 싸움이 붙으면 다섯 번, 종일 싸움이 붙으면 연기와 횃불을 계속 올리는 방식으로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문헌에 의하면 연해의 적들의 동태를 살피다가 비상시에는 동쪽 천관산 봉수에서 강진 남원포 봉수대를 거쳤다.

또 남원포 봉수대에서 서쪽 좌곡산 봉수(북일면)를 거쳐 달마산 봉수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마량 남원포 봉수대는 최남단에 적이 출몰한 사항을 서울 목멱산(현재의 남산)으로 연결돼 조정에까지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봉수제도는 고종 31년 1894년 현대적 전화 통신 체제로 바뀜에 따라 폐지됐다.

이렇게 조선 세종때인 1438년부터 조선말 1894년까지 460여 년 동안 국가의 안위를 지켰던 남원포 봉수대는 봉수제도가 폐지되면서 방치돼 훼손돼 흔적만 남아 있는 채 사실상 폐허상태나 다름없었다.

봉대산에는 등산객들의 길안내를 위한 표지판과 봉수대 흔적으로 보이는 돌무덤만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봉대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100여m 가량 내려오면 조그마한 평지에 봉수대를 지켰던 봉수군(봉졸,오장)들이 살았던 집터의 담장으로 추정되는 돌담이 대나무에 둘러싸여 있을 뿐이었다.

이에 나는 2002년 마량면 출신 윤흥오외 1명의 군의원이 발의한 강진군향토문화유산보호관리조례 제정을 계기로 향토문화재 지정 사업을 진행하게 됐다. 그 첫 번째로 마량 남원포 봉수대를 지정하고 보수를 한 것이었다.

이 조례에서 향토문화유산이란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문화재로 정의된 것 중 국가 및 도지정문화재, 문화재 자료를 제외하고 인위적, 자연적으로 형성된 향토적인 유산으로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경관적 가치가 큰 것과 이에 준하는 고고학적 가치를 가진 자료 등을 말하며 그 유형은 향토무형과 유형문화유산으로 구분된다.

조례 제정이후 최초 향토문화재 지정은 2004년 9월 10일이었고 제1호가 바로 마량 남원포 봉수대였다.

남원포 봉수대를 시작으로 병영 하고 회선정터, 강진서산교회, 군동 명곡서원 등 25개 문화재를 지정했으며 2019년 말 기준으로 현재는 유형 45개, 무형 11개 등 총 56개를 지정해 관리해오고 있다. <정리=오기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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