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사람’
그는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박상우 옹이 한창 교직생활에 몰두하고 있던 1964년 강진읍내의 모습이다. 벌써 반백년의 세월이 흘러 강진읍내의 모든게 변했다. 박상우 옹도 그 세월을 보냈다. 한 인간의 삶이 세월속에 녹아들어 큰 꽃으로 피웠다. =강진일보 자료사진
박상우 옹이 한창 교직생활에 몰두하고 있던 1964년 강진읍내의 모습이다. 벌써 반백년의 세월이 흘러 강진읍내의 모든게 변했다. 박상우 옹도 그 세월을 보냈다. 한 인간의 삶이 세월속에 녹아들어 큰 꽃으로 피웠다. =강진일보 자료사진

먼저 지난호에 게재된 일본역사 원고를 아래와 같이 수정 보완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아좌태자(阿佐太子, 572-645년)는 597년 4월에 왜국에 건너가 쇼오토쿠태자(聖德太子)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 일본 보물(일본국보 1호가 아니라)로 호류사에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

일본의 국보 1호는 광륭사(廣隆寺)에 소장되고 있는《목조미륵보살 반가사유상》(123cm)이다. 일본에서는《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신비한 예술성에 대해 아주 자랑스럽게 여겨왔다.

불상의 그윽한 미소는 마치 모나리자의 은은한 미소에 버금갈 정도로 아름답다. 최근에야 그 작품이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것임이 밝혀져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필자는 8회에 걸쳐 박상우 옹에 얽힌 인간드라마를 정리해 보았다. 그 동안 신문에 게재된 자료는 박상우 옹이 틈틈이 정리해서 넘겨주신 회고록 노우트를 필자가 발췌초록했다. 또한 자유기고가 나름대로 재구성했다.

수차례 필자와의 면담에서 알아낸 정보를 바탕으로 부연설명을 해놓은 것도 있다. 매주 신문연재의 제목과 소제목은 강진일보 대표 주희춘이 저널리스트의 감각으로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시켜 주었다.

또한 원고내용과 사건에 딱 부합(符合)한 역사적인 사진자료도 독자에게 어필했다고 본다. 박상우(93세, 朴相佑) 옹은 유년시절 도일하여 유초중등학교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다.

청소년기에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세계사적 전쟁의 참상을 일본 오사카에서 겪었다. 천신만고 끝에 모았던 부호급에 버금가는 전 재산이 전화를 입어 잿더미가 되버렸다. 온 가족은 겨우 목숨만 살아서 귀국하였다.

박상우는 해방 이후부터 박정희 군부정권까지 20여년간 강진중앙초 외 군내 학교에서 성실하게 근무했다. 이후 줄곧 90여세까지 강진에서 반세기동안 지업사를 경영하면서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했다.

강진의 근현대사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거의 교류했다고 보는 것이다. ‘강진 역사와 지역발전’에 산 증인이 바로 박상우 옹이다. 현재까지 생존하신 인물 중에서 박상우 선생만큼 강진역사와 인물사에 관해 아는 분이 아마 없을 것이다. 박상우 옹은 평생을 책을 벗삼아 지냈다.

그래서 제목을《학이시습(學而時習), 9순(旬)의 박상우 옹》으로 잡은 것이다. 학이시습(學而時習)은 논어(論語)의 첫들머리 학이편(學而篇)에 나오는 구절이다. 공자의 삶을 압축해놓은 명구(名句)이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그대로 해석하자면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공자에게 있어서 ‘學’의 내용은 우리가 말하는 ‘學問’이 아니라,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로 통칭되는 육예(六藝)를 말한 것이다.

이 육예(六藝)가 가리키는 ‘學’이야말로 문무(文武)를 넘나드는 매우 실용적인 개념인 것이다. 필자는 박상우 선생께서 독서에 몰입되어 읽었음직한 지난날의 명작 몇 권을 떠올려 보았다.

정신세계에 자양분이 되었던 문학소설

서양문학 중 흥미진진했던 책 중에『돈키호테, Don Quixote』가 빠질 수 없을 것이다. ‘돈키호테’는 상당히 과장된 설정 속에 부각된 인물이지만, 우리에게 친근한 인간상이기도 하다. 우리의 머리 속에 남아있는 ‘돈키호테’는 ‘엉뚱하다’ ‘망상가’ ‘시대착오적’ 환상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하지만 미워할 수도 없는 인물이다.

일단 ‘돈키호테’의 모습을 보라. 옛 조상이 썼던 녹슨 갑옷을 창고에서 꺼내다 입는다. 가죽과 뼈만 남은 앙상한 말 ‘로시난테’를 타고 스스로 정의의 기사(騎士)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가 ‘라만챠의 기사 돈키호테가 나가신다’고 외치면서 돌진했던 악당들은 다름 아닌 풍차였다.

그가 순정을 다해 사랑을 고백했던 ‘둘치네아’는 다름 아닌 술집 작부(酌婦)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우리는 ‘돈키호테’라면 불명예스럽게도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가리지 못하고 덤벙대는 가벼운 사람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주변과 대책없이 좌충우돌하는 덤벙대는 성격을 가진 사람을  ‘돈키호테’라는 대명사를 붙여 낙인 찍기도 한다.

정작 작가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통해서 진정한 영웅상을 추구했던 것은 아닐까? 라만챠(La Mancha, 스페인의 중부 구릉지대 지명)의 벌판에서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는 비극이면서도 희극이었다. 돈키호테는 희극적으로 묘사되었으나, 실상은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고자하는 인간의 참된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돈키호테’가 연인 ‘둘치네아’를 향해 고백한 말을 들어보자. “우아하고 정다운 둘치네아님이여, 그대의 아름다움이 나를 사로잡고 그대의 덕은 나를 감싸주지 않으며, 그대의 업신여김은 나를 슬프게 합니다. 그래도 말미암아 나는 괴로워합니다” 놀라운 것은 ‘둘치네아’가 ‘돈키호테’의 이토록 애절하고 진실한 구애 앞에서 요조숙녀(窈窕淑女)로 변화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돈키호테’도 되고 ‘둘치네아’도 되야하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진실과 열정, 그리고 변화와 진정성이 아니겠는가?

세르반테스(Cervantes, 1547-1616)는 스페인이 한참 융성했던 1547년 스페인 마드리드 근교에서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의사였지만, 궁핍을 면하지 못했다. 16세에 세빌랴에 있는 예수회학교에서 공부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교황특사를 따라 사동으로 로마에 진출할 기회를 잡게 된다. 그의 생애에서 극적인 경험은 스페인과 터키가 지중해의 해상권 장악을 놓고 격돌했을 때,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스페인은 승리했지만, 세르반테스는 전쟁에서 중상을 입고 더구나 왼손을 잃게 되었다. 귀국하던 중에 해적의 피격을 받아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에 포로로 잡혀갔다. 수차례 탈출을 시도하면서 엄청난 좌절을 겪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어느 수도사의 속전(贖錢) 지불로, 극적인 해방을 경험하고 귀향했다. 이후에 1602년에는 사소한 금전시비에 말려 투옥되었다고 나왔다. 아무튼 ‘돈키호테’가 출판된 것은 세르반테스가 58세 되던 해였다. 세르반테스는 삶의 고통이 모질면 모질수록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의 꿈과 희망을 소리치고 싶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홉은 그의 제자 미이챠에게 이렇게 당부했다.『돈키호테』를 읽어라. 훌륭한 작품이다. 그건 거의 세엑스피어와 한 계열에 놓아야 할 세르반테스의 작품인 것이다.”   

문학과 예술은 국경과 민족을 초월한다. 일본의 여류 소설가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 1922-99)는 한국에 널리 알려졌고, 사랑을 받은 작가이다. 1964년 일본 아사히신문에 소설『빙점』으로 등단했다. 빙점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어느 가정에 양녀로 입양된 소녀가 있었다.

이 소녀는 입양된 가정의 친딸을 죽인 살인범의 자식으로 오인되었다. 20여년 간을 두고 양모에게 미움을 받아 오다가 급기야 그 오해가 풀리게 되었다. 결국 양모가 양녀 앞에 참회한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원죄의 세계를 펼쳐보인 차거운 분위기의『빙점』은 그것의 속편에 이르러 사랑과 용서의 세계로 바뀐다.

여주인공 ‘요코’는 전편에서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안 뒤 스스로를 저주해 자살을 시도하려했다. 속편에 이르러서는 육체적으로 재생하고 또 아가페적 사랑과 용서의 정신에 의해 영적으로 중생하게 된다. 작가 아야코는 그녀의 소설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 그리고 기독교적 중생의 테마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데 득의했던 것이다. 이 소설은 1967년 한국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상연되었다.

김수용이 감독을 했고, 김지미, 한성, 김진규, 남정임이 출연해서 수많은 관객을 동원했던 작품이다. 연달아『이 질그릇에도』라는 소설도 발표했다. 소설『이 질그릇에도』는 미우라 아야꼬의 ‘영혼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자전적 소설이다. 이어서『빛이 있는 동안에』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패전에 의한 혼란 속에서 당시의 불치병인 폐결핵에 걸려 13년간의 투병 생활을 한 저자의 삶과 신앙을 따라가고 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은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구원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소설가 미우라 아야꼬는 1922년 홋카이도 아사히가와 시에서 출생하였다. 아사히가와 시립여고를 졸업하고 아사히신문사 현상소설에『빙점』이 당선되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녀는 24세에 폐결핵을 앓았다, 그 상태가 좋지않아 척추 카리에스로까지 악화되었다. 그 투병생활은 13년 동안 계속되었다. 1959년 몸의 상태가 회복되어 크리스챤 친구인 미우라 미쓰요와 결혼한다.

이후 건강을 회복했지만, 다시 1982년 회갑 나이 때 직장암이 발병, 수술했으나 재발하는 고초를 겪는다. 아야코는 고통스러운 병상생활에서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신앙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 고통의 체험이 그녀의 작품 속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미우라 아야코가 체험한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을 독자들은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남을 정죄하는 것은 자기가 옳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다. 인간이 남을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정죄를 맡기지 않는 일이다” 우리는 날마다 남을 미워하고 정죄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세속인들이다.

작가의 신앙체험과 용서와 사랑의 고백은 우리의 영혼을 일깨워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1960년대 말 강진에서 미우라 아야꼬의 작품을 읽었다. 그 때는 어지간한 여유가 없이는 책을 사보는 시절이 아니었다.

친구 사길진(史吉振, 아남전자사장)의 집에서 이 책 뿐 아니라, 도꾸카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등 당시 많이 읽혔던 일본 번역소설을 빌려다 본 기억이 난다. 아마 선친 사대규(史大奎, 공무원) 선생이 독서에 남다른 취미가 있었는데 어디서 책을 구해다가 아들친구들까지도 빌려다 읽도록한 것이었다.  
  
민족분단의 고난을 파헤친『태백산맥』

『태백산맥』이란 소설은 한국사회에 큰 충격과 파장을 몰고온 현대사 소설이다. 박상우 옹께서도 장장 10권짜리 대하소설을 읽었다. 해방공간에 이어 6. 25 한국전쟁 당시 교사생활을 했던 박옹에게는 남다른 감회와 생각이 있었으리라.

필자도 이 소설을 신선한 감동과 공감을 받으면서 열독했다, 우리 민족의 분단현실로 인한 안타까움으로 절규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는 곳은 전남 벌교이다. 이 작품은 1948년 여순사건 이후 1953년 빨치산 항쟁까지 벌교라는 공간에서 벌어진 좌우 이념대립과 동족상잔의 역사를 소설화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염상진을 위시한 좌익세력은 벌교를 장악해 반동 숙청에 나섰디. 국군이 벌교를 수복하자 좌익세력들은 조계산으로 후퇴한다. 돌아온 우익세력은 좌익에 연루된 사람들을 숙청하고 대대적인 복수에 나선다.

우익진영의 반공청년단장 염상구는 친형인 좌익진영의 중심에 서있던 염상진에 대한 증오로 좌익척결에 앞장 섰다. 염상구는 빨치산의 아내를 겁탈하는 등 만행을 일삼는다. 이를 가슴 아프게 지켜보던 순천 중학교 교사 김범우는 좌 ․ 우익 모두를 비난했지만 오히려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겪는다.

후퇴하던 염상진은 율어를 장악, 해방구로 선포하고 개혁을 실행한다. 토벌대 대장 심재모는 김범수의 민족주의적인 입장에 공감해 염상진 일행에 대해 온건정책을 폈다. 그러나 벌교지역토착 우익세력인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결국 심재모는 율어 탈환에 성공하지만 전출당하고 염상진 일행은 대대적인 군경의 토벌로 절망적인 생활을 이어간다. 이 소설에는 같은 피를 타고 났지만 좌익과 우익 양극단에 서게 된 염상진과 염상구 형제의 골육상쟁의 대결이 민족의 비극을 대변해주고 있다.

좌익 염상진이 자폭하자 그를 뒤쫓던 군경은 그의 떨어진 머리를 수습해 고향인 벌교로 갖고 왔다. 우익세력들은 “악질 빨갱이 염상진 사살”이라는 현수막과 함께 벌교역 앞마당에 효수한다. 6. 25 당시 강진경찰서(사찰계) 앞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벌어졌다.

이 소설에는 좌익과 우익 모두를 비판한 민족주의자 김범우의 입장도 나온다, 술도가의 외아들로 태어나 공산주의자가 된 정하섭과 그를 사랑하게 된 무당 소화 사랑이야기가 가슴이 시리도록 애절하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바닥 사람들을 대표하는 농민들과 천민들, 반공주의자, 사회주의자, 지식인, 지주, 지방토호 권력층들의 이해관계와 계급갈등이 얽힌 드라마를 전개한다.

195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분단과 전쟁을 다룬 ‘분단소설’들이 극단적인 반공소설이거나 아니면 민중의 수난사로만 그려져 이데올로기 혐오증, 부르쥬아적 휴머니즘으로 유도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점에서『태백산맥』은 확실히 달랐다.

이 소설은 핵심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 역사적 계급적 과제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문학적 형상화를 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머리도 냉철해지고 가슴도 뜨거워지고, 우리 민족의 정서와 현실에 부합한 역사드라마라는 점에서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이다.

작가 조정래(趙廷來, 1943~)는『태백산맥(太白山脈)』을 집필한 기본입장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첫째, 반공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되어온 분단사의 진실을 밝혔다.” “둘째, 문학 속에서 ‘계몽대상’ 정도 농민 등 민중이 어떻게 역사의 주체일 수 있는가를 구체적 소설언어로 설명했다.”

“셋째, 사회주의 운동을 정당하게 자리매김하자는 것이었다”(한겨레신문 자료) 이 역사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시는 이러한 비인간적인 동족상잔의 비극을 되풀이 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아닌가. 이제 우리 민족은 북미협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어 정전선언, 평화협정의 단계를 밟아 민족자주를 바탕으로 남북화해와 교류, 평화통일로 당당하게 나아가야할 것이다.

박상우 옹은 자신이 겪어온 인생의 고난을 “전에『오발탄』이란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사람이 어쩌다 잘못하여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라고 자조적인 푸념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박상우 옹은 강진인으로서 현존하는 원로 중 가장 존경받는 분들 중 한분으로 알고 있다.

박옹은 역사적 고난과 인생의 풍파를 인내와 성실로 극복해냈다. 끊임없는 독서와 인재양성, 지역사회 봉사를 통해 고매한 인격적 모범을 보여주신 박상우 선생의 일생에 대해 진심어린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드리는 바이다.
/출향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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