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초 서울 청계천 헌책방을 뒤지던 단국대학교 진동혁교수(국문학)는  ‘부언일부(敷言一部)’란 고서를 발견한다. 이런 저런 한시문을 필사해 놓은 책이었으나 서문이나 발문이 없어 편자와 필사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책이었다.

그런데 책 뒤편에 게재돼 있는 김해암가곡집서, 제해암가곡집후란 부분을 펼친 진교수의 눈이 갑자기 커지기 시작했다.  

삼동(三冬)에 뵈옷 닙고 암혈에 눈비 맞아/ 굴음낀 벗늬랄 쬔 적은 업건마는/서산에 해 지다하니 그를 설워 하노라/

너무나 귀과 눈에 익숙한 시조 ‘서산일락가’였다. 조선 명종때 학자 남명 조식선생이 지은 것으로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 유명한 한시였다. 그런데 이 책에 해당 한시의 저자가 강진 출신의 해암 김응정(1527∼1620년) 선생이라고 게재돼 있는 것이었다.

김교수는 수소문 끝에 강진에 사는 후손들이 보관중인 ‘해암문집’중 8수의 새로운 시조속에서 ‘삼동에 뵈옷닙고~’를 찾아냄으로써 저자를 확증해 냈다. 이 시조를 김응정이란 유학자가 지었다고 밝혀 낸 것은 국문학계에 일대 사건이었다.

시조의 정확한 제목은 문명묘승하작(聞明廟昇遐作). 명종임금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통탄한 마음을 금치 못한 해암 선생의 역작이었다.

이후 해암 선생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우선 상당수 교과서에서 시조의 작자가 수정됐다. 1985년에는 강진읍의 군민회관 앞에 그를 기리는 시비가 세워졌다. 그의 시를 번역하는 작업도 활발하게 펼쳐졌다.  

해암선생은 도강김씨로 병영면 삭둔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담양의 송강 정철, 나주의 백호 임제, 해남의 고산 윤선도와 견줄 정도로 강진을 대표했던 한학자였다.
 
가곡집을 내고 송강 정철의 추천으로 조정에서 경릉삼봉이 란 벼슬이 내려졌으나 이를 거부하고 강진에 살면서 외로운 선비의 길을 걸었다. 도암 성자마을, 병영 용두마을등에 그가 후손을 가르쳤던 장소가 있다.
 
군동 덕호사와 도암 둔덕사가 그를 모시는 원사다. 선조때 올린 ‘청이병영소: 병영성 이전을 요구하는 상소)는 우국충정으로 가득찬 명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올해가 해암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400년이 되는 해이다. 시골 변방 강진에서 태어나 충효에 마음을 다하고 서당을 열어 가르치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 군량미까지 보낸 선비였다.

결코 벼슬에 나서지 않았지만 어떤 벼슬아치 보다 굳센 결기를 품고 살았다. 사후 400주년을 맞아 강진의 선비를 되세길 작은 기념사업이라도 준비하는게 우리 후손들의 책임일 것 같다.  <주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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