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천에 올레길 보다 빠른 ‘역사의 길’이 있다

작천면 구상마을 앞에 있는 양건당애마지총(兩蹇堂愛馬之塚)은 임진왜란때 목숨걸고 싸운 강진 출신 황대중 장군의 묘이자 그의 시신을 전북 남원에서 강진까지 운구해 온 그의 애마의 묘이기도 하다.
전국에 길 열풍을 일이킨 제주 올레길이 개발된 것은 2007년 9월이다. 그 이후 제주 올레길을 본따서 전국에 없는 길이 없을 정도로 많은 걷는 길이 생겨났다.

그런데 올레길보다 7년이나 앞서 걷는 길을 개발한 곳이 있다. 바로 작천면이다. 2000년 7월 작천면향토문화연구회가 바로 ‘작천 역사의 길’이란 올레코스를 개발했다. 지금으로부터 20년전의 일이다.

작천에 산재해 있는 유교문화재를 코스로 연결해서 이곳을 연결하는 작은 오솔길을 걸으며 건강도 돌보고 조상들의 유교정신도 배우자는 목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단한 사업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작천에서 시작됐던 것이다. 원조 올레길이 강진에서부터 시작된 셈이다.

작천면 갈동리 퇴동마을에 있는 입석상. 1992년 3월 9일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87호’로 지정되었다.
2000년 7월 8일자로 선포된 ‘역사의 길 선포문’에 따르면 작천 역사의 길은 면사무소를 출발해서 구상리에 있는 양건당 충효정려각과 말무덤~상곡사~충정사~군자 노효자비와 선돌~갈동 선돌~퇴동 사문안 석조상~한갑보~박산서원으로 이어지는 약 10여㎞의 길이다.

작천향토문화연구회 회원들은 각 문화유산에 작은 간판을 세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누구나 쉽게 문화재를 파악할 수 있게 했다.  당시에는 유교문화재에 변변한 안내간판 하나 없을 때다.

또 헌수운동도 벌였다. 전국의 향우들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도 보냈다.  ‘고향에 헌수를 하실 분들은 기금을 보내주시면 동백, 단풍, 백일홍등을 구입해서 보에 식재할 계획입니다. 작천면 충효의 얼이 지속되도록 격려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유교 유적 연결하는 역사의 길

2000년 작천면장 재임 당시 ‘작천 역사의 길’을 개발했던 마상배 전 면장은 “작천은 관광객이 올 수 있는 문화재가 거의 없는 곳이였기 때문에 역사의 길을 만들어 사람들이 찾아오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마 전면장은 “작천은 불교문화재가 없는 대신 예부터 충신과 효자, 학자들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그들을 기리는 문화재가 아주 많이 있다”며 “이것들을 잘 묶어내고 그 의미를 찾아내면 전국적인 관광자원이 충분히 될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경상도 지역은 유교문화유산이 상대적으로 잘 보존 개발돼 많은 관광자원이 되고 있지만 우리 지역은 그러한 부분이 대단히 낙후돼 있어 그런 자원을 개발해서 제주 올레길 처럼 적극적인 마케팅에 나서야 할 때라는 목표도 있었다.

올레길은 작은 골목을 걷는다는 뜻이고, 요즘 유행하는 둘레길은 산 아래 작은 길이라는 뜻이다. 작천 역사의 길은 그냥 그대로 역사의 길이라고 부르면 될 곳이다.

강진군 작천면 행정길 65-1에 있는 군자서원이다. 가장 활발하게 유교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서원중의 하나다.
작천 역사의 길에 포함돼 있는 유교 유적들을 살펴보자. 작천면 구상마을에 있는 양건당 충효정려각은 정유재란 당시 남원전투에서 사망한 황대중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말무덤은 황장군의 시신을 남원에서 구상리까지 메달고 온 그의 애마의 무덤이다. 황대중 장군은 충과 효를 모두 실천한 장수로 유명하다.

구상마을 앞 들에는 말무덤의 경우 올해로 420여년이 된 무덤이다. 이 무덤에는 사람이 묻혀 있지 않다. 한필의 말이 잠들어 있다. 정유재란때 전사한 주인의 시신을 남원에서 강진까지 짊어지고 달려온 말의 무덤이다. 그의 주인은 작천 구상마을 출신 황대중 장군이었다.

불교유적 없는 작천의 특성살린 길

황대중이란 이름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하지 않지만 그는 김억추, 염걸장군등과 함께 임진왜란때 활약했던 대표적인 강진 출신 장군으로 꼽힌다. 임진왜란 당시 황장군은 이순신장군의 휘하에서 전투에 참여했다.

그는 원래 모친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자신의 왼쪽 허벅다리살을 베어 약으로 쓴 이후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러나 1594년 거제도 싸움에서 오른쪽 다리마저 중상을 입어 양다리를 절룩거리게 됐다.
 
이순신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다리는 효건(孝蹇), 지금의 다리는 충건(忠蹇), 두 다리를 함께 절룩거리니 양건(兩蹇)이로다” 그때부터 그의 호는 양건당(兩蹇堂)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황장군의 애마 이야기 눈길

황장군은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전북 남원성 싸움에서 두 다리를 절면서까지 분전했으나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황대중 장군에게는 둘도없는 충복이면서 수많은 전투현장에 늘 함께 했던 애마가 한필 있었다. 황장군이 전사하자 이 애마는 눈물을 흘리며 주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를 본 병사들이 황 장군의 시체를 거두어 애마의 등에 태워주었다.

말은 적의 눈을 피해 밤낮으로 300리 길을 달려 구상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 도착한 말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굿간에서 고개를 떨구고 서 있었다. 애마는 황 장군의 장례가 끝난 3일 후에야 숨을 거두었다. 이를 본 유족들과 주민들이 말의 시체를 황 장군의 무덤 근처에 묻어 주었다.

이 말무덤이 지금도 구상 마을 앞에 있는 양건당애마지총(兩蹇堂愛馬之塚)이다. 주인을 그렇게 따르던 말은 그날 이후 장수 황씨 문중의 한 가족이 됐다. 작천 일대 황씨들이 지난 400여년 간 이 무덤의 벌초를 하고 있다. 묘가 크고 풀이 잘 자라다 보니 보통 1년에 두 번 정도 벌초를 하고 있다.

상곡사는 용상리 척동마을에 있는 남평문씨 문옹, 문빈, 문구연 3대의 충효를 기린 사당이고 박산서원은 조선시대 청백리로 유명한 청연 이후백 선생을 모시는 사당이다. 퇴동마을 입석상은 한국의 도깨비신앙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고 장승과 연계하여 한국의 석인상 문화를 규명할 수 있는 유형문화적 가치도 크다.

석동마을 입석도 특이한 문화

퇴동마을 입석상도 독특한 문화유적이다. 1992년 3월 9일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87호’로 지정되었다.
입석상은 퇴동마을 입구 당산나무 바로 밑에 있다. 이 입석상은 광복되기 2~3년 전 현재 월남사지가 위치하는 월남리의 주민들이 옮겨갔다가 퇴동마을 주민들이 광복되기 바로 전에 현 위치로 옮겨온 것이라고 전한다.

월남사지와 퇴동마을의 지형적 관계를 고려하면 퇴동마을에 있는 입석상은 사찰 입구의 사천왕상처럼 월남사의 수호신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을 사람들은 이 입석상을 ‘도깨비바우’라고 부르기도 한다.
입석상은 전면과 좌우 3면에 모두 13개의 인물상이 음각되어 있다. 

전면의 입상(立像)으로 상체가 나상이다. 두상은 확실치 않으나 눈 언저리와 코, 입 등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올려 앞가슴에 대고 있으며, 왼손은 어색하게 내려 허리에 대고 있다.

또 도깨비상이 있는데 머리 위에 두 개의 뿔이 달리고, 얼굴을 자세히 보면 도깨비상이다. 앞이마와 양쪽 볼이 툭 튀어나오고, 눈은 사나우면서도 희화적으로 표현되어있다. 이빨은 좌우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부각되었다.

입석상은 단순히 거석문화적 의미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도깨비신앙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나아가 장승과 연계하여 한국의 석인상 문화를 규명할 수 있는 유형문화적 가치도 크다고 한다.

입석상의 앞면과 좌우면에 새겨져 있는 형상들은 민속신앙과 불교신앙을 비교하는 것은 물론 상호관계를 규명하는 비교문화론적 의미도 크다 할 수 있다.

역사의 길에 포함돼 있는 노효자비는 조선 숙종때 아버지가 편찮으시자 겨울에 참새와 죽순을 구해 바치고 위독해지자 손가락의 피를 흘려 넣어 약으로 쓴 노광원이란 사람의 기념비이다.

역사의 길에 포함된 문화유적이 하나같이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한 기념물이 대부분이다. 작천은 이렇게 유교문화유적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곳이다. 작천에는 그 흔한 불교유적이 하나도 없다. 매우 특이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대신 유교문화가 깊게 뿌리를 내린 곳이다.

당시 역사의 길 명명을 주도한 작천면 향토문화 연구회는 ‘우리는 역사의 길목에 산재되어 있는 문화유적지를 발굴 조성하고 보존관리해서 자랑스런 유산으로 후손에게 물려주어 충효를 작천사랑 정신운동으로 승화시켜 면민의 자긍심을 높힌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작천 역사의 길은 큰 빛을 보지 못했다. 일부 공무원들과 초등학교 학생들이 이 길을 걷기는 했지만 외부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이야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걷는 시대가 됐지만 당시만 해도 어떤 코스를 정해 길을 만들고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은 생소한 일이였던 것이다.

좋은 길 만드는 것은 지역민

하지만 지금은 많은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에 ‘작천 역사의 길’을 되살리는 일이 필요한 것으로 요구되고 있다.

특히나 요즘 사람들은 청소년들이 전통문화를 소홀히 한다고 아쉬워하고 있다. 작천 역사의 길에 산재해 있는 유교문화유산은 우리 청소년들에게 역사의 자긍심과 나라와 조상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줄 수 있는 장소로 평가되고 있다.

제주 올레길이 히트를 치면서 전국적으로 많은 길들이 생겨났다. 강진도 마찬가지다. 도로를 가다 보면 곳곳에 안내 표지판이 있고 화살표가 표시돼 있어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의미를 가지고 걸을 수 있는 길이 많다.

최근에는 강진만 해안가를 연결하는 걷기도로가 개설돼 있다. 강진만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건강도 챙길수있는 그런 길이다. 적지 않은 예산도 들어가는게 요즘 걷기길의 흐름이다.

그러나 길은 사람이 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아야 하고, 그 닿는 발길이 다시 이어져 길의 의미를 살려야 걷기 길이 살 수 있다. 작천 역사의 길도 마찬가지다. 좋은 의미를 넣어 길을 개발했으나 찾는 사람들이 적어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점점 잊혀지고 있다.

우선 작천 사람들이 그 길을 애용해야하고, 그 다음으로는 이 길이 유교문화를 연결하는 것인 만큼 지역 유림들이 관심을 갖는 길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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